인도네시아 우체부길
[아츠앤컬쳐] 반둥을 나서자마자 가장 눈에 띄는 먹거리는 뻐염(peyeum)이다. 길다란 고구마에 흰 분칠을 한 것과 같은 모습으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데, 카사바를 숙성시켜 만든 것으로 단맛과 신맛이 난다. 뻐염 중에서도 반둥 근처의 뻐염이 유명하다. 나는 친구인 토미 교수에게 반둥을 지나 수머당으로 향하고 있으며 주변이 뻐염 천지라고 문자를 보냈다. 수까부미 출신의 토미 교수로부터 답 문자가 왔다.
“뻐름뿌안(여성)에는 관심 두지 말고 뻐염에게만 관심 둘 것…” 재미있는 언어의 유희이다. 사실 아재 개그인 셈이다. 반둥을 출발하여 20km 정도를 달리면 짜다스 빵에란(Cadas Pangeran)에 도착한다. 이곳은 자바 우체부길을 건설할 때 빵에란 꼬르넬(Pangeran Kornel) 군수가 저항의 의미로 다엔델스 총독과 왼손으로 악수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과일가게를 지나 길이 휘어지는 곳 왼쪽으로 빵에란 꼬르넬과 다엔델스 총독이 악수하는 모습의 동상이 보인다.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빵에란 꼬르넬은 왼손으로 악수를 하고 그의 오른손은 허리춤의 끄리스(단도)에 가 있다. 여차하면 상대방을 공격하겠다는 표시이다. 저항의 상징 빵에란 꼬르넬의 원래 이름은 빵에란 꾸수마디나따(Pangeran Kusumadinata XI)이며 1791년부터 1828년까지 수머당 군수였다. 자바 우체부길을 무리하게 건설하려는 다엔델스 총독의 압박에 주민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그의 불편한 심기를 왼손 악수로 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빵에란 꼬르넬과 다엔델스 총독이 만났음을 증명하는 문건이 없는 것이다.
조꼬 마리한도노 교수도 이에 대하여 이견을 제시한 바 있다. 그의 주장은 짜다스 빵에란에 관한 비석이 1812년 3월 12일 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다엔델스 총독은 1811년 6월 29일에 자바를 떠났다. 그러니까 자바 우체부길 현장을 시찰 나와서 빵에란 꼬르넬을 만난 사람은 다엔델스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빵에란 꼬르넬이 만난 사람이 누구이건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네덜란드 식민통치 정부의 부당한 강제노역에 대하여 어떤 형태로든 저항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실제로 이 지역은 이름 짜다스(cadas, 자갈밭)가 말해주는 것처럼 다른 지역에 비해 힘든 자갈밭의 비탈 지역이다. 따라서 작업이 더 힘들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더 많은 희생이 뒤따랐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희생을 넘어 주민에 대한 식민통치 정부의 학살이다.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수많은 직간접 학살이 일어났다. 인도네시아 땅에서 네덜란드 식민통치 정부가 자행한 첫 번째 학살은 1621년 3월 8일에 말루꾸의 반다섬에서 일어났다. 향료를 구하는 데에 혈안이 된 당시 쿤(Jan Pieterszoon Coen) 총독은 말루꾸의 향료 밀반입 문제를 해결한다는 미명 아래 반다섬의 주민을 살해하고 일부는 바타비아로 데려와 종으로 삼았다.
이 학살을 피해 섬의 많은 주민들이 다른 섬으로 이주하자 네덜란드 측은 반다 지역의 정향 농장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지역 주민들을 이곳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반다는 마다가스카르와 함께 정향의 주산지로, 네덜란드 식민통치의 주요 목표 중의 하나가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향료를 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무리한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반다 지역에서 희생된사람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식민통치 정부가 그 기록을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 이외에도 일본 식민통치 정부 시대의 서부 깔리만딴 학살, 1947년 네덜란드군의 남부 술라웨시 학살 등으로 많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희생됐다. 이와 함께 1965년 9월 30일 발생한 공산 쿠데타를 진압하면서 희생된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50만 명 비공식적으로 100만 명이라는 것은 그 수효도 수효이지만 같은 인도네시아 사람들 사이에 발생한 학살로 의미가 다르다.
아시아 국가 공산당 중에서 인도네시아공산당(PKI)이 중국공산당보다 1년 먼저인 1920년에 처음으로 창당되었다. 수카르노의 나사콤(NASAKOM) 체제(수카르노 대통령이 민족주의 진영(Nasionalisme), 이슬람진영(Agama), 공산진영(Komunisme)를 같이 비호한 체제를 말한다)에 힘입어 성장한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1965년 9월 30일 대통령경호실장 운뚱(Untung) 중령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9·30사태>이다.
당시 수하르토 장군이 이를 진압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문제는 이 과정에서 쿠데타와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보는 시각이다. 요수아(Joshua Oppenhermer) 감독이 신변에 위협을 느껴가며 제작한 기록영화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 2012)>과 <침묵의 시선(The Look of Silence, 2014)>은 당시 얼마나 잔인한 학살이었는지 증언하고 있다.
1965년 9월 30일의 공산 쿠데타와 관련한 희생을 목격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제작한 이 기록영화가 시사하는 바는 이 <9·30사태>의 진압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 차이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2015년 제주4·3평화재단에서 수여한 제1회 <제주4·3평화상> 특별 수상자로 인도네시아 <9·30사태> 관련 활동가인 이맘 아지즈(Imam Aziz)가 지명되었다.
나는 이 재단의 부탁으로 이맘 아지즈와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우선 제주4·3평화재단에서 이분을 수상자로 결정한 이유는 이맘 아지즈가 <9·30사태>와 관련한 학살과 관련하여 진실 규명과 화해 활동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것이다. 이맘 아지즈 자신은 <9·30사태>와는 무관하지만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맘 아지즈는 가해자 측을 설득해 피해자 측과 화해에 나서게 하였으며 <9·30사태>로 인해 철저히 유린당한 인간 존엄성의 회복과 화해·상생의 공동체 복구를 위해 헌신했다. 이러한 사실이 평화와 인권 존중의 제주4.3평화상의 취지에 온전히 부합한 것이다.
이맘 아지즈는 인도네시아 최대의 이슬람 단체인 나흐들라뚤 울라마(Nahdlatul Ulama, NU)의 문화 분과 위원장이다. 이맘 아지즈와의 인터뷰 결과 그 핵심 내용은 당시 NU가 주축이 되어 공산당과 연관된 사람들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오히려 군부 측에서 이들을 사주하였다는 것이다. 2016년 4월 19일 자카르타에서 개최된 한 세미나에서 이맘 아지즈는 당시 군부에서 NU를 협박 회유하여 공산당과 연관된 사람들의 살해를 교사하였다고 주장했다. 군부에서는 이 단체를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자신을 얻은 이맘 아지즈는 우선 피해자들에게 다가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으며 이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시작하였다. 그는 2000년부터 인권단체 <샤리깟(Syarikat)>을 창설해 운영하고 있으며 학살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자바와 발리를 중심으로 <9·30사태>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풀뿌리 커뮤니티 차원의 화해 사업을 수행하고, 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 정책의 변화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맘 아지즈는 인터뷰 말미에 한국의 상황을 부러워했다. <제주4·3사건>에 대하여 한국 정부 차원의 사과와 관련 평화재단이 설립된 것은 인도네시아에서는 아직 생각하기조차 힘든 일이라고 했다. 그는 우선 인도네시아 정부 차원의 관심과 유감 표명을 유도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라고 했다. 인도네시아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는 이 <9·30사태>에 대한 정리가 인도네시아에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는 초석이 될지도 모른다.
글·사진 | 고영훈
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