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자바의 주청사 그둥 사떼 건물
서부 자바의 주청사 그둥 사떼 건물

[아츠앤컬쳐] 날이 어둑어둑해서야 반둥에 입성했다. 4천5백만의 인구를 가진 서부 자바 주의 주도이며 순다 최대의 도시, 순다 문화의 중심지에 도착한 것이다. 짐을 푼 뒤 우리는 식사를 하러 나갔다. 호텔 직원에게 물어 근처의 순다 음식점에 갔다. 자카르타에도 물론 와룽 나시 암뻬라(Warug Nasi Ampera), 다뿌르 순다(Dapur Sunda), 삼바라(Sambara), 망 엉낑(Mang Engking) 등 유명한 순다 음식점이 있지만 반둥에서의 순다 음식은 무엇인가 다를 것 같았다.

대개는 식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하지만 여기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앉은뱅이 밥상에 음식을 차려놓고 바닥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곳이다. 식당 앞을 지나다 보면 ‘레세한’(lesehan)이라고 써놓은 곳이 이런 식이다. 우리는 바나나 잎에 밥을 싼 나시 띰벌(nasi timbel), 야채 모음인 랄랍(lalap), 생선구이, 새우 등을 넣은 양념장 삼발 뜨라시(sambal terasi), 공심채 볶음(tumis kangkung) 등을 주문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우리는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우리는 서부 자바의 주청사인 그둥 사떼(Gedung Sate) 앞으로 향했다. 건물 중앙부의 탑이 꼬치(sate)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20년 7월에 완공된 이 건축물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위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 날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다음 해에 들어가 볼 기회가 생겼다.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외국 학자를 초청하는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친구’(Presidential Friends of Indonesia)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아시아-아프리카회의가 열린 머르데카 건물
아시아-아프리카회의가 열린 머르데카 건물

포장마차에서 국수로 아침을 때우고 아시아-아프리카 길에 있는 머르데카 건물(Gedung Merdeka)로 향했다. 1955년 4월 18일 <반둥회의>가 개최된 곳이다. <아시아-아프리카회의>(AA Conference)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 인도의 네루 총리,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언라이 총리,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을 중심으로 29개국의 정상들이 모여 회원국 간 협력을 결의했다. <반둥회의>는 결국 비동맹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반둥하면 이 지역 주민들이 ‘반둥 불바다’ 사건과 관련하여 그들의 투쟁을 노래한 <할로, 할로 반둥>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여 독립은 얻은 인도네시아에 다시 연합군과 네덜란드군이 진주하였다. 물론 인도네시아는 진정한 독립을 위하여 네덜란드군에 대한 투쟁과 협상을 하였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맥도널드(MacDonald)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1945년 10월 12일 반둥에 진주했다. 연합군과 네덜란드 측은 반둥을 인도네시아 독립군을 저지하는 전진기지 사령부로 삼으려 했다.

이에 반하여 1945년 11월 21일 인도네시아 측은 영국군이 사령부로 사용하던 반둥의 북부에 호만(Homann) 호텔과 쁘레앙안(Preangan) 호텔을 공격하였다. 연합군은 인도네시아군에게 반둥에서 철수하도록 하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나수띠온(A. H. Nasution) 대령이 이끄는 인도네시아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46년 3월 23일 ‘방화작전’(operasi bumihangus)을 개시하였다. 반둥을 연합군이 사용하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들이 불태워버리겠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자신의 집을 불 지르고 산으로 피신했다. 당시 이를 취재한 <독립의 소리>(Suara Merdeka) 아쩨 바스따만(Atje Bastaman) 기자는 르우 산(Gn. Leutik)에서 반둥이 불타는 것을 보고 ‘반둥 불바다’(Bandung Lautan Api) 제하의 기사를 쓰게 되었고 이때부터 ‘불바다’라는 용어가 생기게 되었다. <할로, 할로 반둥>은 인도네시아인들이 선배들의 투쟁을 자랑스러워하는 노래이다. 이 노래를 인도네시아의 저명한 작곡가 이스마일 마르주끼(Ismail Marzuki)가 만들었다는 의견도 있으나 의견이 분분하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할로 할로 반둥 쁘리앙안의 수도
할로 할로 반둥 추억의 도시
나는 오랫동안 너를 보지 못했는데
지금 불바다가 되었네.
동지여, 다시 이를 쟁취하자.

반둥역
반둥역

머르데카 건물에서 우리는 반둥역으로 차를 몰았다. 반둥역사는 4천5백만 인구를 가진 서부 자바주의 역사치고는 좀 초라했다. 역 앞에는 포장마차가 즐비했다. 우리는 포장마차에 들어가 반둥이 자랑하는 음식 중의 하나인 시오마이(Siomay)를 시켰다. 시오마이는 중국 음식 딤섬과 같은 것으로 인도네시아에서는 반둥의 시오마이가 제일 유명하다. 어묵 딤섬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음식으로 바따고르(Batagor)가 있는데 일단 바따고르는 ‘바소’(bakso, 어묵) + ‘따후’(tahu, 두부) + ‘고렝’(goreng, 튀김)의 합성어이다. 시오마이와 바따고르의 차이점은 용어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전자는 뜨거운 김에 찌는 것이고 바따고르는 기름에 튀긴다는 점이다. 얼핏 보아서는 구분이 잘 안 간다.

20대 초반의 청년이 열심히 좁은 공간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고 그 옆에는 서너 명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나는 조리하는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 포장마차의 주인은 본인이 아니고 따로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기는 고용된 직원인 것이다. 일정 액수의 일급을 받고 매상이 정해진 금액을 넘으면 인센티브를 받는 방식이다. 그 청년이 쉬지 않고 바삐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의 목표는 자신이 직접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대형 포장마차도 아니고 리어카 한 대를 개조해 만든 포장마차에 사장이 있고 종업원이 고용되어 운영되는 시스템이 다소 신기해 보였다.

반둥은 교육도시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의 MIT라고 하는 반둥공과대학(ITB)과 빠자자란대학(UNPAD)이 이곳에 있다. 반둥공과대학은 인도네시아 수재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졸업 후 각계각층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테크노크랏들을 배출하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반둥공과대학 마피아라는 이름을 달고 다닐 정도로 위세가 등등하다. 빠자자란대학 역시 인도네시아의 명문대학이다.

사실 우리는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의 수준 차이가 없지만 인도네시아의 경우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의 수준 차이는 매우 심하다. 일반적으로 사립대학이 국립대학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러니까 인도네시아에서는 국립대학이라고 하면 우수한 대학으로 생각하면 된다. 사립대학 중에는 건물 하나 지어놓고 대학 이름을 붙인 곳도 많다. 우리 자동차는 반둥의 북동쪽에 위치한 빠자자란대학을 지나 수머당(Sumedang)으로 향했다.

글·사진 | 고영훈
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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