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의 대포 위에 올라앉은 꼬마아이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의 대포 위에 올라앉은 꼬마아이

[아츠앤컬쳐] 운전기사 마르띤은 이미 차를 점검하고 세차도 한 후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아침 일찍 찾아온 안디까와 길을 나섰다. 이제 우체부길은 뜨벗(Tebet), 끄라맛 자띠(Kramat Jati), 빤쪼란(Pancoran), 빠사르 밍구(Pasar Minggu), 끄바요란(Kebayoran)을 지나 데뽁(Depok)으로 이어진다. 벤힐 시장을 빠져나온 우리 차량은 수디르만 길에서 좌회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꾸닝안의 빌딩 숲이 우측에 펼쳐진다. 우리나라에서 진출한 백화점이 보이고 이어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던 미국계 호텔의 뒷모습이 보인다. 사실 자카르타, 발리 등지에서 여러 차례 폭탄 테러가 있었다. 우리의 주요 투자국 중의 하나인 인도네시아에서의 테러 문제는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는 지금은 잔잔해졌지만 아체, 파푸아 지역 등의 분리주의 운동, 부패, 느슨한 금융통제, 그리고 바다에 인접한 국경 등의 요소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테러 집단이 활동하기에 좋은 나라이다. 인도네시아는 비교적 온건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회이므로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에게 상대적인 모멘텀을 제공하고 있다.

미국 테러 전문가들은 알카에다(al-Qaeda)가 인도네시아를 유대인이나 미국 등 이교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행동의 동남아 전진기지로 이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알카에다로 의심되는 무장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국제적 압력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2002년 10월 외국인 관광객 164명을 포함 202명의 희생자를 낸 발리 나이트클럽 폭탄테러 이후, 동남아에서 테러리스트 네트워크 분쇄를 위하여 미국 및 호주와 공조를 취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발리 폭탄테러 이외에도 그해 12월의 교회 폭탄테러, 2001년 8월의 말레이시아인에 의한 자카르타 쇼핑몰 폭탄테러, 2003년 8월 자카르타 소재 메리어트 호텔 폭탄테러, 2005년 10월 발리 자살 폭탄테러 등이 국제적인 테러 집단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과 아시아의 관리들은 9·11사태 이후에 빈 라덴 조직이 인도네시아에 거점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고 한다. 2002년 8월 미국은 인도네시아 테러집단이 알카에다와 연계하여 공격 음모 가담하는 것에 대한 경고로 자카르타 소재의 미국대사관을 일시 폐쇄한 적이 있다. 당시 미국은 발리 테러와 관련하여 인도네시아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필수인력을 제외한 모든 인력을 철수시켰다.

​88특공대​
​88특공대​

인도네시아의 폭탄테러 이후 미국, 호주, 일본, 유럽연합 등에서는 인도네시아의 대테러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막대한 지원을아끼지 않고 있다. 인도네시아 경찰은2002년 발리 폭탄테러 사건 이후에 자금, 장비, 훈련 등 분야에서 미국과 호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88특공대(Densus 88)’를 창설하여 이 부대에 대테러 임무를 부여하고 있다. ‘88특공대’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특히 중부 자바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는 제마 이슬람(JI)의 네트워크를 위축시키는데 상당한 성과를 얻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빡 오가는 원래 1981년부터 1993년까지 국영 인도네시아 텔레비전방송국(TVRI)에서 방영한 인형극 드라마 <시 우닐(Si Unyil)>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빡 오가는 빈둥빈둥 놀면서 길목에 검문소를 만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로 동전 한 닢을 요구한다. 자카르타의 빡 오가들은 주로 대로에서 진행하는 차를 막고 골목의 차가 대로로 진출하도록 도와주거나, 유턴하려는 차량을 위하여 반대편의 차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동전을 받는다. 골목에서 나오는 차량이나 유턴을 원하는 차량들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반대 입장에 있는 차량들에게는 오히려 교통체증을 유발한다.

빤쪼란 길목 왼쪽에 자리 잡은 깔리바따(Kali Bata) 영웅묘지를 지나며 인도네시아 제3대 대통령을 지낸 하비비(B. J. Habibie) 대통령이 생각났다. 오래전에 이곳에 묻힌 부인을 못 잊어 거의 매일 부인 묘소에 찾아온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하비비는 수하르토 레짐이 무너지고 1998년 5월부터 1년 반 동안 인도네시아를 통치한 대통령이다.

하비비 전 대통령
하비비 전 대통령

원래 이 분은 과학자인데 1955년부터 10년간 독일에서 항공공학을 공부하고 독일 함부르크 항공회사에 근무하던 중 수하르토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1978년부터 20년간 인도네시아 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이 기간에 100인승 규모의 중형 항공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하비비 대통령은 재임 시 동띠모르를 독립시킨 장본인이다. 동띠모르는 16세기 이래 500년 동안 포르투갈의 식민통치를 받은 나라로, 1975년 11월 28일 독립을 선언했으나 9일 후인 1975년 12월 7일 인도네시아가 강제로 합병하였다. 1999년 하비비 대통령이 독립을 약속하고 2002년 완전히 독립하였다.

하비비 대통령은 1999년 대통령에 재선될 수 있었지만 본인에 대한 국민협의회(MPR)의 불만족스러운 보고서로 인해 불출마를 선언해버렸다. 하비비는 매우 강직하고 올곧은 분으로 정치 모리배들과 타협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하비비 집권 후 함께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이러한 점 때문에 안 된다”라는 말을 당사자 면전에서 함으로써 아랫사람들의 지지를 잃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하비비센터(The Habibie Center)를 세웠고 사회봉사를 하고 있다. 하비비센터는 미국의 카터센터를 벤치마킹한 연구기관으로 민주주의와 인권, 미디어워치, 해양 관련 등 여러 분야를 심도있게 연구하고 있다. 나는 2002년 연구년 기간에 이곳에서 펠로우로 보낸 적이 있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와틱냐(Watiknya) 하비비센터 소장이 빠라마디나(Paramadina)대학에서 하비비 대통령의 연설이 있다고 해 달려가 뵈었다.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2억5천만을 이끈 대통령의 위엄과 저력이 묻어났다.

이런 하비비 대통령이 한동안 깊은 수심에 차 있었다. 2010년 5월 22일 부인 아이눈(Hasri Ainun) 여사가 타계한 것이다. 그동안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독일에 체류했었는데 병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국내로 시신을 운구해와 장례를 치렀고, 당시 유도요노 대통령은 해외 출장을 한나절 미루고 장례식을 주관했다.

국민들도 아이눈 여사의 죽음에 모두 정중한 애도를 표했다. 눈물을 흘리는 하비비 대통령의 모습이 보도되며 하비비 대통령의 부인을 잃은 슬픔이 한동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비비 대통령과 부인 아이눈 여사는 부부 금실이 좋기로 유명한데 부인을 어머니, 누이처럼 따르고 사랑하였고 심지어는 이발을 하러 갈 때도 부인과 함께 했다고 한다.

아이눈 여사는 온화한 성품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전형적인 순종형의 부인이었다. 사택에서 참모들이 밤을 새워 대통령과 일할 때면 슬그머니 다가와 대통령과 참모들의 건강을 염려하고 간식을 챙기기도 했다. 당시 하비비센터에서 만난 대통령의 측근은 대통령의 아내를 잃은 상심이 너무 커서 일상적인 일을 못 보실 정도라고 하며 염려했다. 매일 깔리 바따 부인 묘소에 가고, 부인의 유품을 하나도 버리지 못하게 하는 등 부인을 잃은 애절함이 깊게 묻어났다. 부패에 찌든 인상을 남긴 직전 대통령과는 달리 소박한 하비비 대통령의 모습과 부인에 대한 사랑이 아련하고 애잔하다.

글·사진 | 고영훈
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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