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그레식에서 남쪽으로 10km를 내려오면 땀박랑온(Tambaklangon)이다. 여기에서부터 뚜반에서 갈라졌던 1번 국도와 다시 합류하게 된다. 1번 국도를 따라 다시 10km를 달리니 수라바야이다. 수라바야는 우리의 부산과 비슷한 점이 있다. 항구도시이고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이다. 아무튼 이제 우체부길 800km를 달려온 셈이다. 수라바야로 들어서니 흡사 시골사람이 오랜만에 읍내에 나온 것 같은 느낌이다. 3사단 백골부대 진백골연대에서 근무하다가 와수리로 외출 나온 것 같다.
우리는 숙소를 잡고 식사하러 나갔다. 전에 하비비 전 대통령의 동생 티미(S.A. Habibie)와 같이 수라바야에 왔을 때 이곳의 소또 아얌(soto ayam)을 꼭 먹어야 한다고 해서 허름한 밥집에서 먹은 적이 있다. 인도네시아인들이 즐겨 먹는 음식 중의 하나로 우리 입맛에도 맞는 일종의 닭 국물 국수이다. 수라바야의 소또 아얌은 국물이 좀 더 걸쭉하고 구수한 맛이 난다.
우리는 식당에서 소또 아얌을 비롯하여 생선, 공심채 등을 주문했다. 나는 비르 빈땅(Bir Bintang) 맥주도 한잔했다. 맥주 맛이 좋다. 비르 빈땅은 하이네켄 맥주의 자회사 물띠 빈땅 인도네시아사(PT Multi Bintang Indonesia)가 제조하는 맥주이다. 알코올 5%의 필스너 맥주인데 맛이 좋아 네덜란드, 일본 등으로 수출한다.
자바 우체부길 탐사를 시작할 때는 좀 긴장도 했는데 이제 마음이 편하다. 수라바야에서 직선으로 남하하여 200km 정도를 가면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항구도시 수라바야의 야경은 찬란했다. 라바야는 11세기까지 우중 갈루로 알려졌는데 마자빠힛 시대 이후로 수라바야로 불린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꺼디리의 자야깟왕왕이 이곳에 유폐되어 ‘우끼르 뽈란’이라는 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수라바야는 항구도시로서 국제 향료무역의 중심지였다. 바다를 경영한 자바 해안왕조에게는 수라바야가 중요한 항구였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등의 유럽 세력이 들어오면서 수라바야항을 통한 자바 왕국의 바다 경영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더불어 마따람 왕국의 술탄 아궁이 내륙으로부터 수라바야를 공격하여 결국 1625년에 함락되고 말았다.
사실 당시 마따람은 수라바야를 둘러싸고 있는 성을 뚫을 수가 없었다. 술탄 아궁은 수라바야로 흘러들어가는 강물에 독을 풀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독살하였는데 수만 명에 이르던 인구가 1,000명 정도만남고 다 죽었다고 한다. 그 후 수라바야는 외교력을 발휘하여 뻐끽(Pekik) 왕자를 마따람에 볼모로 보냈다. 이 뻐끽 왕자가 수라바야가 외부에서 받아들인 문물을 마따람에 전하게 된다. 수라바야는 왈리송오 수난 암뻴(Sunan Ampel)이 이슬람을 전한 지역이다.
수난 암뻴의 가계에 대하여도 많은 의견이 있다. 짬빠(Campa) 출신이라는 의견도 있고 빠사이(Pasai)의 왕자라는 말도 있다. 수난 암뻴이 어머니 쪽으로 짬빠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것은 확실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수난 그레식 즉 수난 마울라나 말릭 이브라힘의 아들이라는 의견도 있다.
우리는 수난 암뻴 사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주차한 후에 사원으로 향했다. 사원에 이르는 길은 시장통이다. 이슬람 혹은 수난 암뻴과 관련된 기념품을 파는 시장이다.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붐빈다. 복잡한 시장 안에서 20대 초반의 아기 엄마가 아이에게 모유를 수유하고 있다. 나는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망설여지며 용기가 부족했다. 훗날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다. 사랑스런 아기에게 그렇게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수유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원은 규모가 컸다. 사원의 지붕이 3층의 파고다 형식으로 된 것이 드막 대사원과 유사하다. 수난 암뻴에게서 이슬람을 공부한 라덴 파타가 영향을 받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수난 암뻴의 딸이 라덴 파타의 왕비가 되었으니 그 둘은 장인과 사위 사이이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질서정연하게 사원이며 수난 암뻴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었다. 더러는 사원에서 기도를 드리는 사람도 있었다.
수난 암뻴의 묘소는 사원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묘소는 생각보다 소박했다. 수난 암뻴의 묘소 옆에 둘째 부인인 냐이 짠드라와띠(Nyai Candrawati)의 무덤이 나란히 누워있었다.
수라바야는 쁘라무디아 선생의 대작 ‘인간의 대지’(Bumi Manusia) 4부작의 무대가 된 곳이다. 인도네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 노벨 문학상 후보에 수없이 오른 작가, 팔십 평생 중 17년 반을 감옥에 있었던 작가, 인도네시아의 양심, 인도주의작가 등으로 그를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수라바야를 무대로 한 밍꺼와 그의 여인 아넬리스의 사랑을 떠올렸다. 허구적인 인물이지만 마치 그들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처럼 여겨졌다.
수라바야를 출발하여 남쪽으로 향했다. 워노끄로모(Wonokromo)로 향하는 길이다. ‘인간의 대지’에 등장하는 냐이 온또소로의 저택과 농장이 워노끄로모에 있었다. 밍꺼가 친구 로버트 수우루호프를 따라서 마차를 타고 가던 길이다. 길옆 어딘가에 아쫑이 운영하던 창녀집도 있었을 것이다. 수라바야를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워노끄로모에 도착했다. 아담한 읍내이다.
이어 마스강(Kali Mas)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난다. 저 아래 강가에서 세수를 하는 사람이 보인다. 하기야 옛날에는 아니 지금도 시골에서는 이 강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목욕도 하고 빨래도 하고…… 목적지인 빠나루깐까지는 계속 왼쪽으로 바다가 보인다. 바닷물이 거칠다. 끄라까산에서 20km를 달려 버수끼(Besuki)에 닿았다. 버수끼는 담배 농사로 이름을 날리던 지역이다. 다시 동쪽으로 20km를 더 달리니 빠나루깐 시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목적지이다. 이제 우체국을 찾아가면 된다. 우체국에 닿기 전에 왼쪽으로 항구가 보인다. 다엔델스 시대만 해도 인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큰 항구였다. 우리는 항구 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일꾼들이 분주하게 짐을 나른다. 지금도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는 커피와 설탕을 선적하는 곳이다.
항구에서 나와 좌회전했다. 나지막한 관공서 건물이 보이고 길 오른쪽으로 교회의 십자가가 보인다. 차 안에서는 기독교인지 가톨릭교인지 구분할 수 없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빠나루깐 오순절교회였다. 자바에 힌두왕국이 쇠퇴하고 이슬람왕국이 등장할 때 빠나루깐은 아직 이슬람의 영향권 아래 있지 않았다. 16세기 중반에 이 지역 사람들의 일부는 이미 가톨릭을 믿고 있었다. 1546년과 1559년에 포르투갈이 이곳에 왔었으며 그들의 영향인 것이다. 당시에는 주로 여성들이 가톨릭을 믿었다고 한다.
교회에서 얼마 가지 않아 식료품점, 자동차 정비소, 간이식당 건너편 그러니까 도로 왼쪽으로 빠나루깐 우체국이 서 있었다. 아담하고 깔끔한 우체국이었다. 붉은 기와와 흰 벽면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자바 우체부길의 종착점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처음으로 세 명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제 지금까지 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한다.
글·사진 | 고영훈
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