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르대통령궁 정원
보고르대통령궁 정원

[아츠앤컬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창 밖의 싱그러운 풍광을 구경하는 사이 우리 차는 보고르 시내로 들어서고 있다. 보고르는 5세기에 발흥했던 힌두 왕국 따라마나가라(Tarumanagara)의 중심지였으며 순다 왕국 시대에는 수도로서 빠꾸안(Pakuan) 혹은 빠자자란(Padjadjaran)이라고 불렀다. 순다 왕국은 서부 자바는 물론이고 수마트라 남부 람뿡까지 영향력을 미쳤으나 반뗀 왕국이 들어서면서 몰락했다. 식민통치 시대에는 바이텐조르그(Buitenzorg)라고 불렀는데,‘걱정이 없는, 한가로운(sans souci)’을 뜻한다.

바타비아에서 보고르 구간의 우체부길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됐다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순탄했을 리가 없다. 강제노역에다가 식민통치 정부 및 토착인 관리들의 부패는 이 도로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을 매우 힘들게 했을 것이다.

보고르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의 하나는 뭐니 뭐니 해도 보고르 식물원이다. 87ha의 면적에 15,000종의 다양한 식물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영국이 인도네시아를 통치할 당시 라플스(Thomas Stamford Raffles) 총독은 보고르 관저에 거주했는데 전문가들의도움을 받아 관저에 영국풍 정원을 조성했다. 이것이 지금 보고르 식물원이 탄생하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그 후 독일 출신의 식물학자 칼 라인바르트(Caspar Georg Karl Reinwardt)가 주축이 되어 식물원을 만들었다.

보고르식물원의 수목
보고르식물원의 수목

1816년 영국이 물러가고 그 이듬해 부임한 카펠란 총독이 1817년 5월 18일 공식적으로 보고르 식물원을 완공하였고 칼 라인바르트는 1822년까지 이 식물원의 책임자로 일했다. 보고르 지역은 1년 365일 중 70%가 비가 오는 지역이다. 보고르는 ‘비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자바해에서 불어오는 수증기를 품은 해풍이 내륙으로 들어오면서 이 부근의 살락산, 그데산과 만나 수직상승하면서 비를 뿌리게 된다. 워낙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이 부근의 골프코스는 아예 오후에는 비가 올 것으로 보고 그린피를 할인해서 받는다.

기사 마르띤에게도 같이 식물원이 들어가자고 하니 마다한다. 뙤약볕에 걸어서 식물원을 관람하는 것이 그에게는 별 매력이 없었을 것이다. 나와 안디까는 입장권을 구입하여 정문으로 향했다. 식물원 주변에는 장사치들이 물건을 팔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 지역의 대표 음식 중의 하나인 아신안(asinan)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눈에 뜨인다. 아신안은 야채와 과일을 절여 국물을 잘잘하게 넣은 음식물인데 루작(rujak)과도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루작은 신선한 야채를, 아신안은 절인 야채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약간 출출하기도 하여 안디까와 나는 아신안 하나를 시켜 둘이 맛보았다.

식물원 입구에 들어서면 라플스 총독의 부인 올리비아 라플스(Olivia Marianne Raffles)의 백색 기념비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1814년 바타비아에서 병사했는데 그의 기념비를 이곳에 세웠다. 조금 더 들어가면 식물원의 설립자 칼 라인바르트의 동상이 보인다. 워낙 큰 식물원이기 때문에 일부만 볼 수 있다. 처음 보는 식물들도 많았다.

보고르식물원 안의 묘소
보고르식물원 안의 묘소

한참을 가다 보니 중년의 현지인이 조그마한 무덤을 지키고 있다. 다가가 물어보니 자기 조상의 묘소라고 하는데 지방의 유지였던 것 같았다. 호기심이 일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니 약간의 기부금을 내야 한다고 한다. 5만 루피아를 기부하고 묘소를 살펴보았다. 묘소에는 참배객들이 뿌린 형형색색의 꽃송이가 흩어져 있었다. 식물원 뒤쪽으로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묘지가 형성돼있다. 이끼가 낀 묘비가 여럿 보였다. 식물원 한쪽에 죄지은 사람들이 웅크리고 숨어있는 듯하다. 식민통치 정부의 관리나 상인으로 먼 곳에 와서 뼈를 묻은 사람들이다.

보고르대통령궁 본관
보고르대통령궁 본관

보고르 대통령궁은 1870년부터 네덜란드 식민통치 정부 총독의 공식 관저로 사용되었다. 원래는 2층 건물이었는데 1834년 10월 11일 지진으로 파손되어 1층으로 재건축한 것이다. 1994년 11월 15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제2차 정상회담이 이곳에서 열렸으며 이때 보고르선언이 채택되었다. 보고르 대통령궁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철제 울타리 안으로 백색의 대통령궁 건물과 그 앞 정원에는 사슴 무리들의 노니는 모습이 보였다. 대통령궁 옆의 도로에는 마차꾼이 델만이라고 부르는 마차를 세워두고 꼬마 아이와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전통 마차
전통 마차

보고르에서 한 군데 더 들린다면 그곳은 바로 바뚜뚤리스(Batutulis) 비문이다. 이 비문은 순다 왕국의 수라위세사왕이 자신의 선왕인 실리왕이왕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으며 고 순다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으로 인하여 행정구역 상 이 지역 이름이 바뚜뚤리스 면이다. 도로 옆에 위치한 삼각형 모양의 이 비문은 조그마한 건물 안에 모셔져 있고 그 앞에 사람 발자국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받침돌이 있다. 신기할 정도로 발자국이 깊게 드러나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이 밟아서 그렇다는데 그것을 증명할 길은 없어 보였다.

바뚜뚤리스를 나와 이제 기수를 완만하게 남동쪽으로 틀어 반둥으로 향해야 한다. 쁘리앙안(Priangan)으로 불리는 서부 자바의 산악 지역들, 그러니까 찌아위, 찌사루아, 뿐짝, 찌마히를 거쳐 반둥에 도착하고 오늘은 그곳에서 여장을 풀 예정이다.

글·사진 | 고영훈
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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