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나는 자카르타 숙소에서 자바 우체부길이 시작되는 아냐르로 단박에 차를 달렸다. 나의 우체부길 탐사에는 디뽀네고로대학(Universitas Diponegoro) 역사학과 안디까(Andhika)가 동행했다. 안디까는 국립인도네시아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내 친구 마만(Maman S. Mahayana) 교수의 큰아들이다. 스망기(Semanggi) 바타비아 아파트에서 아냐르로 출발하는 기분은 좀 야릇했다. 전장에 나가는 사람처럼 비장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보물찾기를 떠나는 사람처럼 기대에 부풀기도 하였다.
벤힐(Bendungan Hilir) 시장통을 빠져나온 우리 차는 자카르타-머락(Merak) 고속도로로 금세 접어들었다. 일단은 자바 우체부길의 시작 지점인 아냐르 해안으로 향했다.도로 좌우편으로 공장 지대가 펼쳐지더니 이어 시원한 들녘이다. 출발 한 시간 반 만에 우리 차는 머락을 저만치 두고 급하게 좌회전하여 찔레곤(Cilegon) 시내로 접어들었고 이어 아냐르 자바 우체부길 제로 포인트에 도착했다.
자바 우체부길의 제로 포인트 표지가 있는 곳은 원래 찌꼬넹(Cikoneng) 등대가 있었던 자리이다. 제로 포인트에 적혀있는 숫자 1806은 이 등대가 건설된 해를 의미한다. 그러나 1883년 8월 26일 끄라까따우 화산이 폭발하였고 그 여파로 쓰나미가 일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이 화산 폭발로 36,000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끄라까따우 화산 폭발은 뉴욕과 노르웨이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폭발의 분진으로 말미암아 이틀 반 동안 해를 볼 수 없었다. 찌꼬넹 등대도 함께 사라졌으며 그 후 2년 뒤인 1885년 원래의 자리에서 100여 m 뒤쪽에 등대가 재건되었다.
아냐르 앞 바다 저만치에는 끄라까따우 화산 폭발로 새로 생긴 라까따(Rakata) 섬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파도는 그리 잔잔하지 않았다. 앞바다는 황톳빛이었으나 먼바다는 검푸른 빛깔이었다. 오른쪽 끄라까따우 제철소가 있는 쪽으로는 대형 선박이 정박해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03년에 아냐르를 통하여 자바에 발을 디딘 후 이 지역을 통치했던 반뗀(Banten) 왕국의 허가를 받아 무역관을 설치하였고 7년 후인 1610년 초대 보스(Pieter Both) 총독을 파견하였다.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통상 350년간 식민통치를 받았다고 말하는데 그 기점이 보스 총독이 부임하는 1610년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798년 나폴레옹이 네덜란드를 침공한 후 해체되었다. 그 이후 인도네시아는 1811년까지 프랑스 영향력 하의 네덜란드 식민통치 정부의 총독이 통치하며 1811년부터 1816까지는 영국이, 그 후에는 네덜란드가 다시 통치하였다.
이 지역은 원래 순다(Sunda) 왕국이 오랫동안 통치하였는데 1527년 자바 최초의 이슬람 왕국인 드막(Demak) 왕국의 술탄 뜨렝고노(Trenggono)의 지시로 마울라나 하사누딘(Maulana Hasanuddin)과 파타힐라(Fatahillah)가 순다 끌라바 항을 접수하면서 드막의 영향력 하에 들어갔다.
사실 1521년 드막의 술탄 빠띠 우누스는 말라카에 진주한 포르투갈군을 공격하였으나 본인도 전사하고 그 결과 공격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순다왕국이 포르투갈과 정치 경제적으로 협력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빠띠 우누스의 동생인 술탄 뜨렝고노가 순다 끌라빠를 공격하게 된 것이다. 1570년에는 마울라나 하사누딘의 아들인 마울라나 유숩이 권좌에 올라 반뗀 왕국의 영향력을 넓혀갔다. 이 지역이 원래 서부 자바 주에 속했다가 2000년부터 반뗀주로 자립하게 된 것도 반뗀 왕국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찔레곤은 1888년에 네덜란드 식민통지 정부에 반기를 드는 소요사태가 일어난 곳이다. 끼 와싯(Ki Wasit)을 비롯한 반뗀의 유지들이 주도한 이 사건은 피 식민통치 상황에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888년의 이 지역의 상황은 처참했다. 1883년에 끄라까따우 화산이 폭발하여 인근의 아냐르, 머락(Merak), 짜링인(Caringin), 시리(Sirih), 빠사루안(Pasauran), 따주르(Tajur), 그리고 짜리따(Carita) 지역이 피해를 입었으며, 그 이외에도 기아, 페스트, 가축 전염병 등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때 네덜란드 식민통치 정부에서는 가축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려는 이유로 물소를 살처분하도록 하는 지침을 내렸다. 게다가 이슬람을 모욕하는 조치도 한몫했다. 당시 이 지역의 부감독관 구벨스(Goebels)는 이슬람 사원의 아잔 이슬람교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좀방 뜽아(Jombang Tengah) 지역 사원의 탑을 철거해버린 것이다. 이슬람교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지역 주민들, 특히 이슬람 지도자들이 주동이 된 시위대는 찔레곤 지역에 거주하는 네덜란드인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군대가 속히 개입하여 소요를 진압하였다. 이 사건 이후에 끼 와싯은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다른 이슬람 지도자들의 주동하에 시위대는 오지로 유폐됐다.
찔레곤에서 자카르타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이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다. <찔레곤주민 투쟁기념비>로 명명된 이 조형물을 살펴보면 사원의 모습, 칼과 창을 들고 유럽인을 공격하는 이슬람교도들의 모습이 뚜렷하게 부조되어 있다. 오랜 기간 동안의 식민통치를 겪으면서도 인도네시아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저항과 투쟁을 했다는 중요한 증거물이다.
글·사진 | 고영훈
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