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 스망기 교차로 부근
자카르타 스망기 교차로 부근

[아츠앤컬쳐] 세랑에서 우체부길을 따라 땅어랑, 다안 모곳(Daan Mogot)과 그로골(Grogol)을 거쳐 바타비아(자카르타)로 넘어오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5km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이다. 바타비아에서의 우체부길은 글로독(Glodok), 망가두아(Mangga Dua), 안쫄(Ancol), 구눙 사하리(Gunung Sahari), 끄마요란(Kemayoran), 빠사르 바루(Pasar Baru), 따나 아방(Tanah Abang), 벨터브레덴(Weltevreden, Gambir), 빠사르 스넨(Pasar Senen), 끄라맛(Kramat), 살렘바(Salemba), 마따람(Matraman), 망가라이(Manggarai)를 거쳐 미이스터 코르넬리스(Meester Cornelis, Jatinegara)로 이어진다.

사실 다엔델스가 총독으로 재직할 때 바타비아의 영역도 확대되었다. 당시 바타비아 주변 지역은 불결한 늪지였다. 쿤 총독이 집권할 때 바타비아 건설에 동원된 사람의 4분의 3이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 다엔델스는 바타비아를 위생적인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인딴(Intan) 지역의 요새들을 철거했다. 그리고 남쪽으로 벨터브레덴(Weltevreden, 지금의 감비르) 지역을 새로 건설하고 반뗑(Banteng) 지역 동쪽에 새로운 관저를 건축했다. 이 관저 옆에 탈것을 보관하는 막사도 함께 지었는데 이 건물들은 후에 식민통치 정부의 출판국인 발레이 뿌스따까(Balai Pustaka)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다엔델스는 벨터브레덴을 거주, 행정, 군사의 요충지로 만들었다.

다엔델스는 인딴의 요새를 철거한 후 영국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벨터브레덴보다 더 남쪽인 미이스터 코르넬리스(Meester Cornelis, 지금의 자띠느가라)까지 방어선을 확대 구축하였다. 이것은 다엔델스 시대에 바타비아의 도로들이 순다 끌라빠항구에서 미이스터 코르넬리스까지 병력 및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정도로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틱랄회교사원
이스틱랄회교사원

전술한 바와 같이 다엔델스는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의 동생 루이 나폴레옹이 보낸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엔델스는 1789년 프랑스에서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일어난 이 혁명의 기치와는 전혀 다른 통치 행위를 했다. 그의 통치 행위에 자유, 평등, 박애정신은 없었던 것이다. 다소의 자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가톨릭을 믿는 유럽인에게 국한된 것이기는 했지만 종교의 자유이다.

다엔델스가 부임하기 전에 네덜란드 식민통치 정부는 가톨릭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못했다. 그것은 개신교를 신봉하는 네덜란드가 가톨릭을 믿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80년을 투쟁한 것과 관련이 있다. 쿤총독이 말루꾸에서 왜 가톨릭을 학대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당시 개신교로 개종한 가톨릭 신도에게만 쌀을 배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다엔델스가 자바에서 가톨릭에 대해 관대했다는 것은 가톨릭을 인정했다고 보아야 한다.

1942년 일본이 자바에 진주하면서 일본 식민통치 정부는 바타비아라는 이름 대신 자카르타(Jakarta)를 사용하였다. 서구 세력이 사용하던 바타비아라는 이름을 무조건 바꾸어야 했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기치를 내걸고 인도네시아에 진주하였다. 동양의 세력이 대동단결하여 서구의 식민통치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기치는 어느 정도 호응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이 인도네시아에 처음 진주했을 때 인도네시아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측으로서는 350년 동안 자신들을 식민통치한 네덜란드를 일본이 물리친 데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인도네시아가 일본의 진주에 대한 오해를 푸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본은 인도네시아를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물자 조달 기지로 생각했다. 그리고 1942년 일본의 상황은 한국 등지에서 30년 이상 식민통치를 경험한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인도네시아를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한국에서 시행한 강제노역, 일본군 강제위안부 등의 악랄하고 비인간적인 제도를 인도네시아에 그대로 적용하였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350년 동안의 네덜란드 식민통치보다 3년 반의 일본 식민통치가 더 가혹했다고 이야기한다.

일본군은 바타비아를 자카르타로 바꾸면서 미이스터 코르넬리스를 자띠느가라로 바꾸어 불렀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 지역을 코르넬리스로, 현지인들은 메스터로 줄여서 불렀는데 이것이 어떻게 자띠느가라가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엔델스가 총독으로 부임하기 이전에 이 지역은 사유지로 야자수와 사탕수수밭이 대부분이었다.

다엔델스가 이 지역을 영국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기지로 구축하면서 군부대 기지, 장교 양성소, 무기 제조학교 등 군사 관련 기관이 생겼다. 그리고 네덜란드 식민통치 정부는 이 지역에 찌삐낭과 부낏 두리 등의 교도소를 건축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다엔델스는 이 지역을 거주지 및 행정 도시로 발전시켰다.

우리 일행은 자카르타에서는 자띠느가라까지만 둘러본 후 각자 집으로 가서 1박하고 다음 날 다시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어제 자카르타에서 시작하여 자바섬의 서쪽 끝인 아냐르의 자바 우체부길 제로 포인트 지점에서 시작해서 다시 자카르타에 온 것이다. 사실 여기부터 동쪽으로의 여정이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긴 여정이 남아 있다.

나는 스망기(Semanggi)의 아파트로, 안디까는 보고르의 집으로 각자 돌아갔다. 본격적인 여정을 위한 준비를 하고 내일 다시 만나기로 했다. 하루 만에 머나라 바타비아(Menara Batavia) 아파트 23층의 숙소로 가는 것인데 며칠이 지난 것 같다. 집에 가서 필요한 짐을 챙긴 후 여기저기 연락하여 필요한 사항을 점검해야 한다. 마음은 급한데 집으로 들어가는 길의 교통체증이 여간이 아니다.

자카르타에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이동하는 데에는 인내심과 다소간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다면 버스를 타기는 어렵고, 기껏해야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다. 나도 몇 번 이용해 보았다. 교통체증이 심해서 약속시간이 늦는 경우에는 타고 가던 차에서 내려 오젝(Ojek, 퀵 오토바이)을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보다 싼 편은 아니다. 예를 들어 플라자 스나얀에서 뻐르마따 히자우(Permata Hijau)까지 만 오천 루피아를 요구한다. 택시를 탄다면 1만 루피아 정도 나올 것이다.

인구 천만이 훨씬 넘는 도시에 지하철 없이 버스와 택시 등의 대중교통으로 이동수단을 해결해야 한다면 교통체증의 정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수디르만 길 등의 주요 간선도로를 통과하는 차량에 대하여 출퇴근 시간에 ‘쓰리 인 원’(three in one)제도를 시행하다가 최근 없어진 것은 그것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제도로 인하여 수디르만 진입로 입구에 차를 타주고 돈을 받는 조끼(joki)라 불리는 직업(?)이 있었다. 지금은 이 제도가 폐지되고 차량번호를 기준으로 출퇴근 시간에 홀짝제를 시행하고 있다. 차량 2부제로 출퇴근 시간에는 이틀에 한 번 자신의 차량을 이용할 수 있다. 자카르타에서 인터넷이 느리다고, 교통의 체증이 심하다고 짜증을 낸다면 본인만 손해이다. 그곳에 있는 동안에는 ‘느림의 미학’을 실천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할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수도 자카르타의 극심한 교통난을 해소하기 총 110여 km 노선의 경전철 건설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 국내 민관 컨소시엄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1000억 원대 규모의 경전철 1단계 건설사업을 최종 수주했다. 후속으로 이어질 5조 원대 규모의 2, 3단계 사업을 따내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우리 기업이 자카르타 교통난 해소를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어 다행이다.

글·사진 | 고영훈
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저작권자 © Arts & Cultur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