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인류와 함께 문명이 발전하면서 문명의 역사가 곧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부족, 도시, 국가 간의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상대보다 앞선 기술과 전투력을 확보하기 위해 기술은 더욱 발달되어왔다. 인류 문명 발전의 계기가 인류에게 가장 위협적인 전쟁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북한이 그 많은 주변국들의 강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미사일과 핵을 끊임없이 개발하는 것도 이런 인류 역사의 한 단면이라 볼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비극적인 전쟁도 승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좋은 예술적 소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를 가보면 베키오 궁 500인의 방에 엄청난 스케일로 그려진 조르조 바사리(1511-1574)의 마르시아노 전투장면이 있다. 그런데 이 방의 벽화에는 흥미로운 역사가 있다.
1500년대 초 피렌체공화국은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500인의 방 양쪽 벽면의 벽화를 의뢰했다. 두 화가 모두 피렌체가 승리했던 전쟁을 주제로 작업에 착수했으나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완성하지 못하고 피렌체를 떠났다. 2012년 바사리의 ‘마르시아노 전투’가 원래 의도했던 벽 위에 새로운 벽을 만들어 그려졌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마르시아노 전투’에 가려진 작품이 스케치만 전해지던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일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집권세력이 바뀌면서 다빈치의 작품이 무참히 지워졌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슬픈 이야기이지만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그때도 있었나 보다. 다빈치가 그렇게 유명했어도 작품을 지키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이런 전쟁들 가운데 오페라 안에 등장하며 눈길을 끄는 전쟁이 있다. 바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다. 이 전쟁은 그 유명한 프랑스의 여왕 ‘마리 앙투아넷’의 어머니이며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권을 인정할 수 없었던 유럽의 여러 왕위 계승 서열 상위 왕족들이 벌인 전쟁이었다. 영국의 지원을 받은 오스트리아, 반면 바이마르와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지원을 받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아프리카에서의 영토 주도권과 이익을 위한 신경전과 맞물려 전쟁이 온 유럽으로 확전되었던 것이다.
이 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투 장소였으며 광물자원이 풍부했던 오스트리아의 슐레지엔을 둘러싼 전투(1744)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스페인 연합군이 전쟁에 참전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전투를 배경으로 한 베르디의 오페라가 있는데 제목이 음악보다 더 기억에 남을만한 <운명의 힘(1862)>이다.
스페인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 한 두 남자가 운명적으로 만난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찾아다니는 카를로,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를 총기 오발 사고라는 어이없는 운명의 장난으로 죽이게 되어 도망친 알바로. 둘은 전쟁터에서 서로의 목숨을 구해주는 전우 사이가 된다. 한편 전쟁터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던 알바로는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카를로에게 상자 하나를 주며 무엇인지 알려 하지 말고 자신과 함께 묻어 달라 청한다. 다행이 알바로는 수술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나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카를로가 상자를 열어 자신의 여동생과 야반도주하려 아버지를 살해한 강력한 용의자가 바로 알바로 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알바로는 카를로를 피해 수도원으로 도망치지만 집요한 카를로는 그를 찾아내 모욕적인 말들과 폭력으로 결투를 하게 되고 싸움을 걸었던 카를로가 오히려 치명상을 입는다. 마지막 유언을 하게 해달라는 카를로를 위해 주변 동굴에서 급하게 찾아낸 수도사는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알바로의 여인이며 카를로의 여동생 레오노라가 아닌가? 이산가족이 만났는데 느닷없이 카를로는 마지막으로 알바로에 대한 원망과 복수를 담아 여동생을 향해 칼을 꽂는다. 그리고 이 장면을 목격한 알바로는 괴로움 끝에 절벽 밑으로 투신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다.
이러한 잔혹한 결말(초연이었던 러시아 세인트피터즈버그 버전)은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베르디의 고향 이탈리아에서는 허용되지 않았고 죽어가는 카를로와 여동생 레오노라를 위해 알바로가 기도하며 마치는 온건한 결말로 수정된다.
베르디는 이 작품뿐 아니라 여러 작품이 무대에 올리기 까지 참 우여곡절이 많았던 작곡가이다. 빅토르 위고의 원작으로 만들었던 오페라 <리골렛또> 역시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야 했고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자국의 입장을 빗대어 만들었던 오페라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탈리아 제2의 국가로 또 심지어 우리나라 광복절 기념 공연에서도 자주 불려진다. 이 작품으로 베르디는 이탈리아의 영웅으로 지금까지 대접받고 있으니 오페라의 왕 베르디는 검열이 필수였던 블랙리스트 예술가가 만인의 위시리스트로 화려하게 변신한 대표적 예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문체부 예산의 비중은 전체 예산 중 2%가 채 되지 않는다. 그나마 그 안에서도 혜택의 음지와 양지가 존재한다. 기존에 받던 분들 입장에선 갑자기 못 받아 분노하지만 그마저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힘없는 그러나 재주 많은 아티스트들도 정말 많이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정치적 산물인 블랙리스트는 뿌리 깊은 문화계의 데스노트라고 할 만큼 파장이 크다. 예술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자위하다가도 주위에서 농담으로 “거기에라도 들어간 사람은 행복한 거다.”라는 말을 들을 때 깊게 공감이 되는 이 마음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무척이나 헷갈린다.
신금호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오페라로 사치하라' 저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 영국 왕립음악원(RSAMD) 오페라 석사, 영국 왕립음악대학(RNCM) 성악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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