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의 일이다. 집 앞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낯선 형이 다가와 내게만 로봇을 보여주겠다 하여 뒷골목으로 따라 들어갔다. 낯선 형은 로봇을 보는 대가로 삼백 원을 요구했고 뭔가에 홀린 듯 일주일 치 용돈을 탈탈 털어준 나는 돌아오지 않는 형을 한 시간 넘게 기다렸다. 그 정도의 시간은 아무리 어리고 순진한 마음에도 속았음을 깨닫게 해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그때야 어려서 그랬다지만 비슷한 경험을 아직도 종종 겪고 있으니 한숨이 나온다. 그런데 최근 나라 전체가 크게 속아 매일 분노와 탄식으로 시끄럽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폭로가 터져 칼럼 주제를 마감일까지 고민할 정도다. 불과 며칠 전까지 권력의 꼭대기에 있던 그들이 포토라인에 서서 쏟아지는 질문들에 앵무새처럼 모르쇠를 읊고, 초라한 모습으로 호송차에 끌려 오른다. 죽을 죄를 지었다면서 정작 조사를 받을 땐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심지어 조사관 앞에서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웃는 사진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세상을 순진하게 살고 있었구나 하는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대한민국은 오랜 봉건제도를 겪고 시민 중심의 민주주의 국가로 모습을 갖춘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그나마 조금 살 만한 세상이 되어가는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린아이도 다 아는 보편적인 가치와 도덕을 비웃듯이 검은 거래는 지속되고 있었다. 문화계에 종사하는 지인들이 워낙 많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모두 이래서 그동안 정부 지원 사업에 추풍낙엽 신세였구나 하는 성토들이 많이 들린다. 물론 필자도 비슷하게 느끼는 한 명이다.
이렇듯 우리에겐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전대미문의 최 여인이 있는 반면, 프랑스에는 나라를 구했던 용감한 여인이 있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으나 여러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왕을 위해 인생을 걸었다는 것, 여러 이적을 통해 왕의 신뢰를 받았다는 점, 왕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누가 뭐래도 신탁을 받은 대로 밀고 나갔다는 점, 그리고 그녀를 향한 재판 중에도 자신의 주장하는 바를 굽히지 않는다는 점,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마술을 부리는 무당이나 마녀로 불렸다는 점이다. 그 이름은 바로 ‘잔 다르크’.
영국과 프랑스의 왕위쟁탈전 속에 벌어진 100년 전쟁(1337~1453, 116년)의 한가운데 혜성처럼 등장한 16세의 소녀는 대관식도 못 치른 발루아 왕가의 황태자를 구원하라는 신의 계시를 듣고 황태자를 찾아가 이적을 보이며 미친 여인이 아니라는 공증을 마친다. 그 후 군사를 이끌고 오를레앙 지역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그들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샤를 7세의 근거지에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랭스까지 적진 속 400km를 죽어도 못 가겠다는 황태자를 끌고 결국 대관식을 치르게 한 대단한 여인이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그냥 소녀지만 그녀는 이렇게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왕은 항상 신탁만을 부르짖는 잔 다르크가 부담스러웠고 그녀를 따르는 많은 백성들로 인해 질투심마저 느꼈다고 한다. 왕은 은퇴하겠다는 잔 다르크를 설득해 다시 전쟁에 뛰어들게 했다. 하지만 후방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잔 다르크는 전쟁에서 패해 영국과 손잡은 부르고뉴 공작 측에 포로로 잡혔고 부르고뉴 측은 영국에 돈을 받고 잔 다르크를 영국에 넘겼다. 그리고 종교재판을 거쳐 신성모독과 혹세무민이라는 죄명아래 마녀라는 죄명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19세의 어린 나이에 화형에 처해졌다. 나 몰라라 했던 샤를 7세는 3년 후 억울한 그녀의 마녀 혐의를 풀어주고 프랑스 교회는 그녀를 성녀로 추대했다. 돌아보면 살아서는 프랑스를 구했고 적국에 넘겨져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조차도 분열되었던 프랑스 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여러 오페라 작곡가들에게 흥미로운 소재로서 여러 오페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무대 위에 올라가고 있는 대표 작품은 베르디의 <Giovanna d’Arco(Teatro alla Scala, 1845년)>이다. 베르디의 오페라에는 잔 다르크가 악마에 씌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부녀간의 인연까지 끊고자 하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리고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잔 다르크는 세속적인 사랑보다는 오직 신의 뜻에 따라 살겠다며 왕의 제안을 거절한다. 아버지의 배신으로 영국군에 잡혀가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하게 되지만 잔 다르크의 진실된 기도를 듣던 아버지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딸을 풀어준다. 그렇게 한 번 더 영국과의 전투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잔 다르크는 결국 영국군을 물리친다.
하지만 전쟁에서 치명상을 입었고 슬퍼하는 샤를 7세와 아버지를 남기고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며 막을 내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잔 다르크의 스토리와 다르게 연출된 이유는 당시 작곡자 베르디의 악보 출판업자 리코르디가 쉴러의 스토리를 참조해서 독창성이나 판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아서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대본가 솔레라는 ‘제발 나를 쉴러나 세익스피어와 함께 도마에 올려놓지 말라. 내가 진짜라니까!’라는 자신감 넘치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탄생한 오페라 <잔 다르크>는 역사적 정설과는 다른 드라마틱한 내용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지금은 영웅의 모습으로 역사에 남은 잔 다르크지만 한때 대중들은 그녀를 마녀라 믿었다. 지금 생각으론 한없이 어리석게 느껴지지만, 역사상 초유의 사태로 믿을 수 없을 만큼 탐욕스러운 악당들을 마주한 지금 우리는 잔 다르크의 누명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두 눈 부릅뜨고 더 이상 현혹되지 않도록 경계할 일이다.
신금호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오페라로 사치하라' 저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 영국 왕립음악원(RSAMD) 오페라 석사, 영국 왕립음악대학(RNCM) 성악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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