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ise and Express!

Highway 2007 © Ryan McGinley
Highway 2007 © Ryan McGinley

 

[아츠앤컬쳐] 작년 말 서울의 대림미술관에서 라이언 맥긴리(Ryan McGinley, 1977년생, 미국 사진작가)를 초청하여 그의 사진 작품을 수개월간 전시한 적이 있었다. 필자가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인 2007년 늦은 가을경 이 젊은 사진작가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뉴욕 파슨스(Parsons The New School for Design, 1896년 설립)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했고, 불과 24세에 이미 휘트니 뮤지엄(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1931년 설립, New York)에서 개인전을 가질 정도로 일찍 눈에 띄었다고 한다. 남녀친구들과 여행하면서 올누드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사진에 담은 한 젊은 사진가의 유희적 실험이 당시에 흥미롭게 회자되었다.

그의 서울전시회를 찾아온 관람객들의대부분은 젊은 세대들이었고, 방대한 양의 노골적인 누드사진 앞에서 차라리 다들 할 말을 잊은 듯 보였다. 전시회의 주제는 ‘청춘’이었다. 작품설명을 하는 도슨트는 맥긴리의 청춘에 대한 도발적이고 자유로운 일탈에 대해 열변에 가깝도록 찬사를 하였다. 과연 이제 36살의 이 젊은이는 “모든 인간이 누드로 태어났으니 옷 입은 것이 오히려 섹시하게 느껴진다”고 말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누드를 통해 청춘의 순간들을 마음껏 그의 똑딱이 카메라(소형 자동카메라, Compact Camera)에 담았다.

맥긴리가 이처럼 젊은 나이에 인정을 받게 된 배경에는 바로 그 청춘이란 것에 대한 사회적 유보와 관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시장에서 도슨트는 후원사의 선물이 있는 즉석퀴즈를 내었는데, “청춘은 OO이다”의 문장을 자유롭게 완성시키는 문제였다.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고 그중에 한 청년이 상품을 받았지만 필자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답은, “청춘은 유보이다”였다.

근년 국내에서 개최되는 흥행 위주의 블록버스터 사진전, 그것도 아직 생존해있는 상업사진가들의 전시회가 자본력에 힘입어 크게 홍보되는 것을 보며, 이 젊은 미국 사진가마저 이렇게까지 국내에 크게 소개할 이유가 무엇인지 사실 의문이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시장을 나서면서 결국 필자는 이런 전시를 유치한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일 우리의 젊은 작가가 국내에서 이런 시도를 했다면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마치 청춘예찬과도 같은 그의 작품 이면에는, 우리의 사진예술이 얼마나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여전히 묶여있는지 반성해볼 수 있는 메시지가 들어있기도 하다. 아직 필자는 국내 사진계의 전반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말할 자격이나 경험이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귀국 후 그동안 겪은 국내 사진교육 현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느끼는 바가 있다.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는, 우리 학생들은 교수의 취향에 눈치를 많이 보면서 소신껏 실험적인 사진을 하지 못하는 듯한 현상이다. 교육여건도 선진국들과 비교가 안 되는 상황에서 하물며 상상과 표현까지 자유롭지 않다면 어떻게 도전적이며 창의적인 작품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세계는 참으로 넓고, 다양하고, 기회가 많은데 우리 학생들은 마치 골목길의 대장들 앞에 줄을 서서 예의를 지키며 일탈을 유보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인간관계에서 예절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중시하던 유교의 도덕 지침인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정신은 아무리 오늘날 세태가 어지러워져도 그 기본정신만은 빛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필자 역시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예절이라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기 위해 아래, 위를 떠나 서로 필요한 덕목인데, 오히려 대접을 받기 위한 근거로만 오용되는 것은 혹시 아닌가?

자신을 기준으로 예절의 잣대를 들이대면, 결국 나에게 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슨 소리를 듣든 마음에 들어 하게 되고, 나에게 소홀하게 한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주위에서 아무리 좋은 평가가 있어도 싫어하게 마련인 것이다. 결국, 자신에게 유리, 불리한 것만을 따지는 세상에서의 예절은 그 의미가 퇴색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여러 가지 형태의 파벌과 줄서기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않은 우리 현실의 이면에는 이런 자기중심적인 이해관계가 숨어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번 여름에 방한했던 교황은 메시지를 통해, 평화는 단지 다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의 결과로서, 오늘날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정도로 정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과연 목숨과 바꿀만한 가치를 갖고 있기나 한지 반성해 볼 것을 권유하였다. 예술가가 스스로 자유와 용기를 잃고 질문을 던지지 못한다면, 그의 작품에서 그저 유희적, 상업적 의미 외에 어떤 가치를 찾을 수 있겠는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진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젊은 사진학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일어나 표현하라, 그리고 넓은 세계무대로 나가자, 한국의 젊은 사진가들아!

글 | 신성균
아츠앤컬쳐 편집위원·사진작가, 홍익대학교 겸임교수
미국 AAU (Academy of Art University)·사진학·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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