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tail and Time as Punctum
[아츠앤컬쳐] 잘 나가는 젊은 상업사진가가 있다. 그의 일상은 늘 바쁘기만 하다. 스튜디오에서 조수의 도움을 받아가며 모델들과 촬영에 몰입하거나 광고주들을 쫓아다니며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주된 일 외에도, 철부지 모델 지망생들을 상대하기도 하고 사진에 필요한 소품을 찾아 골동품 상점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어느 날, 분주한 일과 중 자투리 시간에 카메라를 들고 공원을 잠시 산책하던 그는 데이트 중인 남녀 한 쌍과 조우하고, 희희낙락(喜喜樂樂)하는 그들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한 장, 두 장 담는다.
제법 오래된 영화인 ‘블로우 업’(Blow-Up, 1966)의 도입, 전개부에 해당되는 줄거리이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 1912~2007, 이탈리아) 감독의 이 영화는 국내에 ‘욕망’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다.
우여곡절 끝에 그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해본 주인공은 아직 마르지 않은 사진들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이상한 부분을 발견한다. 블로우 업, 즉 확대라는 의미의 영화제목은 바로 여기서부터 그 의미를 드러낸다. 계속 확대해보니 그 남녀를 향해 나뭇가지 사이로 권총을 든 사람의 손이 보이는가 하면, 그들이 멀리 사라진 곳에는 쓰러진 사람 같은 물체도 희미하게 보인다. 호기심에 확인차 가본 현장에는 정말 낮에 데이트하던 그 남자가 숨져 있다. 충격 속에 스튜디오로 돌아왔으나, 그 사이에 누가 다녀간 듯 난장판이 되어 있고 그 필름과 사진들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급한 마음으로 다시 그 공원으로 달려간 사진가, 이번에는 아까 분명히 보았던 남자의 시신마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음을 보고 허탈과 혼란에 빠진다. 실재와 사진,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필자가 강의에 사용하는 시청각 자료 중의 하나인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사진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사유를 하게 된다. 우선 지난 호에서, 현존하는 표적을 향한 조준과 격발, 그리고 노획물에 있어서 비슷한 속성, 즉 죽음의 의미를 지녔다고 설명했던 총과 카메라가 이 영화에 함께 등장한다. 거듭, 총은 사체를 카메라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될 존재의 이미지를 남긴다고 하였다.
이 스릴러(thriller) 영화의 핵심은, 주인공이 촬영할 때는 인식하지 못했던 어떤 피사체가 추후 필름의 현상과 인화과정에서 미세한 부분이 확대되면서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리고 드러난 그 디테일(details)은 매우 충격적이다.
만일 주인공이 사진가가 아니라 가령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고 가정하면 지금 설명하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그림이든 연필이나 붓이 지나간 모든 흔적은 화가의 의도와 행위에 의해서 가능하다. 화가가 인식하지 못한 디테일이 그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단단한 기반으로 삼고 있는 사진의 속성 중의 하나는 무엇인가?
그렇다. 사진가가 촬영할 때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피사체들의 모든 디테일을 다 인식하고 셔터를 누르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의도하거나 인식하지 못했던 피사체들의 어떤 세부 이미지로부터 감상자들이 뜻밖의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보편적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 반응일 경우를 ‘푼크툼’(punctum)이라고 하며,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 프랑스 철학자)가 사진의 의미작용(signification)에 관한 오랜 연구 끝에 유작 ‘밝은 방’(Camera Lucida, 1980)을 통해 완성한 개념이다.
실제 존재의 세부적인 이미지를 셔터 한 방에 포획할 수 있는 사진에서만 오직 가능한 ‘푼크툼’은 사진가와 감상자(사진가 자신 포함) 사이에 발생하는 일종의 ‘뜻밖의 의미화 사건’으로서, 감상자들에 대하여는 소위 ‘열린 의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 장의 사진에서 보편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서나 의미를 바르트는 ‘스투디움’(studium)이라는 용어로 개념화하였으며, 해석의 여지가 별로 없는 ‘닫힌 의미’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보자. 루이스 하인(Lewis Hine, 1874~1940, 미국 사진가)의 지적장애아사진(Idiot Children in an Institution, New Jersey, 1924)을 보면 그들의 특이한 모습이 먼저 인식되는데, 이것은 대부분의 감상자가 느끼는 보편적 정서요 문화인 바, ‘스투디움’이다. 하지만 바르트는 오히려 작은 어린이가 입은 저고리의 깃, 그리고 큰 여자 어린이의 손가락 붕대로부터 어떤 개인적 감정을 경험한다고 하였고, 마치 뾰족한 것으로 찌르는듯한 그 느낌을 비슷한 뜻을 가진 라틴어의 어원을 따라 ‘푼크툼’으로 명명한 것이다.
그는 다락방에서 발견한, 어머니가 다섯 살 때 온실 앞에서 오빠(즉, 바르트의 큰외삼촌)와 함께 찍은 사진으로부터 이런 사유를 출발하였다. 즉, 그 사진에는 이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없으며 ‘언젠가 죽는다’는 ‘죽음’의 의미가 담겨 있다. 모친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함께 찌르듯 다가오는 이런 감정은 오직 바르트 자신에게만 의미 있는 개인적 경험으로서, 전술한 사진의 세부묘사에서 비롯되는 개별적 감정과 함께 ‘푼크툼’ 개념을 ‘시간성’으로 확장한 시도이다.
사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과 그들의 초상사진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사진을 통한 바르트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별적 의미를 보편적으로 확장하는 데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글 | 신성균
아츠앤컬쳐 편집위원·사진작가, 홍익대학교 겸임교수
미국 AAU (Academy of Art University)·사진학·MF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