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춥고 비가 많이 오는 겨울이 지나고 삼한사온처럼 가을 날씨와 따스한 봄 같은 날씨가 반복되고 난 후 맞이하는 봄은 언제나 불꽃놀이를 하듯 곳곳에서 봄빛이 터져 나온다. 가끔 봄을 시샘한 서늘한 바람이 가냘픈 꽃잎들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금세 움츠러들지만 목마름과 추위를 이겨낸 아프리카 야생화들은 그때부터 시합이라도 하듯 앞다투어 고개를 내밀고 꽃망울을 터트린다. 우리 집 정원에서부터 시작된 꽃 축제는 점점 동네로 퍼져 초록빛이 안 보일 정도로 하양, 분홍, 노랑, 보랏빛으로 가득해지고 웨스트 코스트 내셔널 파크 국립공원에 가면 절정을 이룬다. 가만히 있어도 가슴속으로 간질간질 꽃바람이 스며들어 어느새 나는 카메라를 챙겨 그곳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곳에선 셀 수 없이 많은 봄빛이 터져 나와 온통 세상을 물들인다. 그 봄빛들은 바다와 하늘 그리고 바람과 어우러져 우리를 유혹한다. 겨울에만 조금씩 뿌려지는 단비에 몸을 적시며 피어나는 이름 모를 꽃들…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은 아니지만 함께할 때나 혼자일 때나 모두 아름답다.
웨스트 코스트 내셔널 파크는 야생화로도 유명하지만 세계 3대 조류보호구역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꽃이 피는 봄도 아니었고 그냥 벌판에 마른 풀들만 자라고 있었고, 바닷가 브라이(남아공식 바베큐)하는 곳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바다에서 홍합을 건져 끓여서 먹고 온 기억밖에 없었다. 오직 보이는 건 갈매기뿐 새가 많다는 사실도 그런 새들을 봐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한두 번 방문하는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몽구스, 작은 여우, 타조, 이름 모를 빛깔 고운 크고 작은 새들… 벌잡이새(Bee-eater)는 우리나라 원앙의 빛깔을 모두 갖고 있는데 날아갈 때 초록꼬리가 펼쳐지면 날개의 빛깔과 더불어 아름다움이 한층 더해진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이 벌을 먹는 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벌을 잡아서 바로 먹지 않고 둥지로 가지고 가 기절을 시킨 후 먹는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벌잡이새를 찾게 되면 부리에 혹시 벌을 물고 있는지 살피게 되고, 둥지가 있는 곳까지 따라가 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느리게… 자연을 즐기고 새들의 소소한 날갯짓 하나도 유심히 보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지도에 나와 있는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는 곳에 도착하면 차에서 내려 걷는다. 좁게 나 있는 길을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바람 따라 걸어가면서 많은 생명체와 눈 맞춤을 한다.
언젠가 한번은 좁은 길을 걸어가다가 덤불 숲 뒤쪽에서 풀을 뜯고 있던 스프링복 무리와 만난 적이 있다. 서로 놀라 내가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서자 반대쪽으로 달아나던 어린 스프링복이 몇 번씩이나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 스프링복이 앞서 가다 다시 되돌아와 아기 스프링복 옆에 서면 다시 뒤돌아 나를 쳐다보고… 그때 아기 스프링복과 시선이 서로 맞닿을 때의 느낌은 어떤 표현으로도 그 감정을 담아낼 수가 없다.
또 한 번은 바위너구리를 보기 위해 여러 개의 바위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방금 식사를 마치고 날아오르려는 독수리를 보았다. 예전 같으면 무서운 독수리는 물론 먹다 남은 거북이 껍질을 보는 것만으로도 징그러워 소리치며 난리법석을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놀라기는 했지만 그냥 우리가 알고 있던 자연세계의 한 장면이라 생각하고 무덤덤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솔직히 그 광경보다 너무나 덤덤한 나 자신에게 더 놀랐다고나 할까. 그곳에 가면 언덕 위에 하얀 집이 있다. 어떤 용도로 지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집 벽에 나 있는 창을 통해 바닷물이 들어와 만들어진 에메랄드빛 호수를 본다. 집 밖에서 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똑같은 세상인데 집안에 들어가 바깥 풍경을 보면 내가 서 있고, 앉음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자리를 옮길 때마다 풍경이 달라 보인다. 나만을 위한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가 파노라마처럼 스르르 넘어가는 착각이 들 정도로…
오픈 시간에 맞춰 일찍 가지만 늘 문 닫는 시간이 지나서 나올 때가 많다. 그곳에서 나올 때면 늘 생각나는 말이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들꽃처럼 멀리서도, 가까이에서도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글 | 고영희 아트 디렉터, 사진작가
아프리카 문화 예술 교류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으며, KBS 라디오 통신원, 예술가를 꿈꾸는 아프리카의 빈민촌 아이들을 돕는 레인보우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