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우리는 이탈리아와 유럽 중세 시대의 위대한 화가 중 하나로 조토를 이야기한다. 흔히 이 시대 예술의 대부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직감으로 예술사에 혁명을 일으킨 조토가 이전과 이후 시대를 아우르는 흔적을 남겼다. 조토는 그 이전까지는 절대적으로 인정받는 작품들을 만들어오다가 변화를 가져온 혁명적 인물이었다. 그는 서양에 원근법을 소개하고, 작품에 명암의 힘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프레스코 벽화의 인물들의 움직임과 감정을 강조하면서 예술에 심리학의 개념을 불어넣었다.
그는 1267년, 피렌체 근교 비키오의 투스카나에서 태어나 피렌체로 이주하여 그림을 배웠다. 젊은 시절부터 그의 그림 실력에 대한 풍문으로, 콤파스 없이도 완벽한 원형을 그렸던 것과 또한 돌 하나에 양을 그려놓은 일 등이 있다. 스승 치마부에(Cimabue)를 놀려준 에피소드도 유명한데, 그가 탁자 위에 그려놓은 파리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스승이 탁자로 돌아와 파리를 쫓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토가 살았던 때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중요한 1230년~1348년 사이, 즉 페스트가 유럽인의 절반을 사망하게 한 시기로 불과 5년 만에 1억 명의 인구가 5천만으로 줄어들었다. 이탈리아와 유럽의 문화적 기초가 세워진 때로 조토뿐 아니라, 위대한 시인 단테(Dante)와 수학자 피보나치(Fibonacci)의 시대이며, 피렌체와 시에나, 피사와 같은 중세도시의 건설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절대적인 경제 성장으로 이후 르네상스의 토대가 마련되지만, 진정한 예술적 르네상스는 조토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그의 작품은 로마에서 피렌체, 아씨시에서 리미니, 파도바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반도에 걸쳐 그의 위대함을 보이며, 14세기뿐만 아니라 다가올 르네상스의 화풍에도 영향을 미쳤다.
얼마 후 조토는 제자들과 함께 공방을 열어, 주로 작품의 디자인과 중요한 구성 설정을 담당했으며 제자들을 보조로 썼다. 조토는 비잔틴 예술의 추상주의를 뛰어넘어 탁월한 묘사로 자연적 현실성에 입각한 사실적 장면들을 구성했고, 깊이 있는 3차원의 배경 위에 서로 소통하는 인물들을 표현하는 데 능숙했다. 조토의 자연주의는 유연한 인간 형상과 영혼, 감정을 표현하는 개성적인 인물들을 창조했다. 그는 항상 인간의 감정을 심오하게 연구했으며 이는 생생한 사실주의적 표현으로 완성되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조토는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 화가 중 한 명이지만 그가 또한 훌륭한 건축가라는 사실을 모두가 아는 것은 아니다. 그는 ‘조토의 종탑’이라고도 불리는 피렌체 대성당의 종탑을 만들었고 중세 예술에 원근법을 도입했다. 물론 당시의 원근법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소실점이 한 지점에 집중되지 않고 축을 따라 길게 배열되어 “물고기의 척추”라 불리던 원시적 관점이었지만, 이를 도입함으로써 비잔틴 예술의 2차원성을 극복했으며 현실에 더 가까운 형태를 창출해냈다.
피렌체의 걸작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십자가(Crocefisso di Santa Maria Novella)>는 조토가 혁명적인 방식으로 다룬 첫 번째 주제로, 전통적 도상법과 달리, 대신 그리스도의 시체를 수직으로 그리고, 다리를 구부려 무게감을 추측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조토는 예수의 몸에 인간적이고도 대중적인 형상을 부여했다. 이러한 새로움은 예술의 모든 의미와 세속적 차원까지도 그리스도에게 돌려주는 가장 깊은 영적 의미를 끌어냈으며, 새로운 종교적 감수성을 표현했다. 오로지 후광만이 그의 신성함을 나타내었으며, 감상자가 느낄 만한 진정한 고통 중의 겸손한 인간의 모습이 나타났다. 당대의 예술에 대한 조토의 급진적 도약은 하나님의 아들을 신이 아닌 인간으로 표현했다.
그의 그림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씨시 건설 현장에 합류하기 전 로마 여행에서 형성되었다. 당시 로마에는 피에트로 카발리니(Pietro Cavallini)와 자코포 토리티(Jacopo Torriti)가 속한 회화학교가 있었는데, 이는 고전 미술의 전형적이며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대표했다. 이후 조토는 아씨시로 향했다. 사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아씨시의 대성당에 있는 이탈리아 중세의 최고작인 프레스코화 시리즈 <성 프란시스의 이야기 주기(Ciclo delle storie di San Francesco)>이다.
조토는 항상 여행을 많이 했다. 조토는 리미니로 가서 학교를 설립했고, 다시 파도바로 떠나 스크로베니(Scrovegni) 가문의 의뢰로 스크로베니 성당에서 작업했다. 이 시기의 프레스코화 시리즈는 회화사에 절대적인 명작들이다. 파도바의 부유한 은행가 엔리코 스크로베니는 당시 고대로마의 경기장을 매입하고, 1301년부터 호화로운 궁을 짓기 시작했으며 개인 예배당은 이후 부부의 묘지가 되었다. 조토에게 의뢰된 프레스코화들은 당대 위대한 신학자들에게 영감을 받아 전체에 통일된 도상학적 장식과 인물의 구성법을 뛰어넘어 작품을 그려냈다. 대표되는 주제들은 감정을 표현하고, 기록하고, 인간성을 묘사한, 당대의 진정한 혁명이었다. 조토는 그림으로 소통하고 메시지를 전하기를 바랐다.
조토의 프레스코화에서 우리는 그의 메시지를 본다. 천상의 천국을 열망하려면 신성한 가르침과 이성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진리의 발견 및 신학적 미덕의 실천을 따라야 한다. “신의 치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통해 거짓된 믿음을 부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이야기'와 비교할 때, 장면은 더 단순하고 명확한 서술적 구성을 보인다. 정교한 표현이 증가하고, 서술적 효과, 제스처, 자세, 표현, 색채에 대한 구성이 더 잘 통제된다. 형상은 아씨시에 비해 더욱 현실적인 부피로 표현되며, 아래의 인체들은 형태를 짐작할 만한 넓은 망토로 둘러싸여있다. 그림은 더 부드럽고 밀도가 높으며, 더 펼쳐진 모양으로 인물들은 더 풍부하면서도 덜 뚜렷하게 강조된다. 장면들은 신성함에 걸맞게 엄숙하며, 얼굴과 몸짓은 영혼과의 가장 친밀한 상태를 보인다.
간단히 말해, 조토는 그림으로 중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의사 소통자가 되었다. 그가 프레스코화를 통해 사회 전체에 새로운 가치를 전달한 이후, 1348년 전염병이 닥쳤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다시 태동했다.
번역 | 길한나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글 | 로베르토 파시 Basera Roberto Pasi
Journalist, Doctorate Degree University of Siena(Literature, Philosophy, History of Art with honors) Study at Freiheit Univerisität Berlin, Facilitator at Osho Resort, Poona Ind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