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체코를 대표하는 음악가라면 단연 안토닌 드보르작(Antonin Dvořák 1841~1904)이다. 그가 살던 시대의 체코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주도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공용어는 독일어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체코 음악의 다양한 가능성을 꽃피우고 그것을 세계의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세기의 유명한 독일 지휘자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 1830~1894)는 그를 브람스에 버금가는 ‘신이 보낸 작곡가’라고 칭송한 바 있다. 사실 드보르작처럼 풍부하고 아름다운 선율의 곡들로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음악가는 그리 많지 않다. 그의 명작인 <신세계 교향곡>, <첼로협주곡>, <슬라브 춤곡>, <유모레스크>, <어머니가 가르치신 노래> 등 대곡부터 소품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게 스며든다.
드보르작은 1841년 9월 8일에 프라하 근교 넬라호제베스(Nelahozeves)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넬라호제베스는 지금도 인구 1,500명도 되지 않는 마을이다. 이곳에서는 언덕 위에 세워진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성채가 먼저 시선을 단순에 사로잡는다. 이 품위있는 성채는 보헤미아의 유력 귀족가문인 롭코비츠 가문이 1623년에 구입한 이래로 롭코비츠 성이라고 불린다. 드보르작의 어머니는 바로 이 성에서 일하던 집사의 딸이었다.
드보르작의 아버지는 작은 여관과 정육점을 경영했다. 당시 보헤미아의 시골에서는 활기찬 축제가 많았으며 사람들은 낙천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풍부한 음악적 감성을 키우며 성장하던 드보르작은 집 앞 성당의 소년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또 시골학교 선생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얼마 후에는 아버지와 함께 결혼식이나 축제에 함께 연주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받을 수 있던 음악교육은 이것이 전부였다. 왜냐면 11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 밑에서 푸줏간 일을 본격적으로 도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드보르작이 12세가 되자 아버지는 가업을 물려줄 생각으로 여관과 푸줏간을 경영하는데 필요한 독일어를 습득하도록 그를 외삼촌이 사는 소도시 즐로니쩨로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의 진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은인을 만나게 된다. 은인은 다름 아닌 그의 독일어 선생 안토닌 리만이었는데 이 선생은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다. 선생은 드보르작에게 음악이론을 비롯하여 오르간 및 피아노 연주법에 대해서도 가르치면서, 그의 비상한 재능을 알아보고는 가업을 계승시키려는 그의 부모를 끝까지 설득하여 아들이 음악가의 길을 걷도록 했고, 또 그의 외삼촌에게는 조카를 경제적 후원하라고 설득했다. 이리하여 소년 드보르작은 16세 때 청운의 꿈을 안고 수도 프라하로 향했던 것이다.
드보르작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는 1932년에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그의 생애에 관련된 자료, 자필 악보, 편지, 당시 사진, 전보, 개인적으로 소유하던 책과 물건 등을 전시하고 있다. 생가 옆 넓은 녹지대에 세워진 드보르작의 동상은 롭코비츠 성 쪽을 바라보며 지휘봉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보헤미아의 다른 농부들처럼 완고하고 땅딸막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그가 9살 때 넬라호제베스에 철도가 놓였는데 그때부터 그는 기차에 매혹되었고, 평생 동안 기차에 대해 지대한 흥미를 보였다. 그는 1904년 5월8일에 프라하에서 영원히 눈을 감을 때까지 그동안 여러 나라에서 수집한 수많은 장난감 기차를 지켜보며 고향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추억했으리라.
글·사진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역사, 언어 분야에서 30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했으며 국내에서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동유럽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외에도 여러 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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