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사이로 보이는 원통형 탑
건물사이로 보이는 원통형 탑

 

[아츠앤컬쳐] 체스키 크룸로프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도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체코는 크게 서쪽의 보헤미아 지방과 동쪽의 모라비아 지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지에서는 보헤미아를 ‘체키(Čeky)라고 하고, 그 형용사는 체스키(Český)이다. 체코에는 크룸로프(Krumlov)라는 지명이 모라비아에도 있기 때문에 이와 구별하기 위해 보헤미아의 크룸로프를 ‘체스키 크룸로프’라고 한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프라하에서 남쪽으로 약 160km 블타바강 상류 물줄기가 S자처럼 굽어 휘어지는 곳에 위치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에 아주 가깝다. 사실 체코가 1918년에 슬로바키아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로 독립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주도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땅이었으니 국경의 개념이란 전혀 없었고, 또 이곳에 독일어권 주민들이 많이 살았다. 예로,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1890~1918)의 어머니는 바로 이곳 사람이었다. 이런 연유로 실레는 한동안 이곳에 와서 작품 활동을 했다.

체스키 크룸로프 전경
체스키 크룸로프 전경

체스키 크룸로프에는 파스텔 색조로 예쁘게 단장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이곳에는 현대건축물이란 전혀 없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마치 3백~6백 년 전의 시간이 그대로 굳어져 버린 듯하다. 이곳 시가지의 구심점은 바위 동산 위에 우뚝 세워진 성이다. 특히 성의 지붕을 뚫고 나온 원통형 탑은 시내 어디에서나 보인다. 그러고 보니 도시의 규모에 비해 성이 상당히 크다. 사실 이 성은 체코에서 프라하성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그렇지만 이 성은 군림하는 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분홍색과 초록색조의 그림으로 단장된 원통형 탑은 하늘로 솟아오를 듯한 모습이지만 전혀 위압적이지 않고 오히려 친근하게 보인다.

이 성이 처음 세워진 것은 1250년. 그 후 1302년에 독일계 로젠베르크 가문이 이곳의 주인이 되어 이 성을 크게 확장했다. 피렌체에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면 체스키 크룸로프에는 바로 로젠베르크 가문이 있었던 것이다. 로젠베르크는 독일어로 ‘장미의 동산’이란 뜻이다. 이 가문이 1602년까지 300년 동안 통치할 때 체스키 크룸로프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으니, 그야말로 이곳은 ‘장미꽃이 만발한 곳’이 되었던 셈이다. 그러고 보니 이 성에서뿐만 아니라, 성 비투스성당, 시청사를 비롯하여 시내 주요 건축물 곳곳에 장미꽃잎 5개로 디자인된 로젠베르크 가문의 문장이 유난히도 눈에 띈다.

파스텔 색조의 건물. 건물 외벽에 로젠베르크 가문의 문장이 보인다.
파스텔 색조의 건물. 건물 외벽에 로젠베르크 가문의 문장이 보인다.

체스키 크룸로프에서는 이 성을 찾아보는 것 외에 좁은 골목길을 따라 그냥 걷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무심코 걷다가 보면 원형 탑이나 강물과 마주치게 되거나, 아니면 시청광장 안에 들어서게 되는데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전혀 없다. 사실 이곳은 인구가 13,000명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 하지만 체코에서는 프라하 다음의 관광명소로 손꼽힌다. 그런데 체스키 크룸로프가 아름다움을 항상 유지해 왔던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다행히도 전쟁의 참화로부터 안전했지만,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완전히 방치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당시 이곳은 꿈과 낭만이 가득한 도시가 아니라 우중충하고 귀신이 나올 듯한 황량한 도시로 보였을 것이다.

체코가 1989년에 민주화되고 난 다음 체스키 크룸로프는 본격적인 복원작업을 통하여 불사조처럼 다시 태어나 아름다운 옛 모습을 되찾았으며 1992년에는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었다. 체스키 크룸로프가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체코 사람들의 지난날 암담했던 공산주의 시대의 기억을 하루 속히 떨쳐버리려는 강렬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하늘로 치솟으려는 원통형 탑은 미래를 향한 부활의 상징으로 보인다.

 

글·사진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역사, 언어 분야에서 30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했으며 국내에서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동유럽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외에도 여러 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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