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독일 북동부 유서 깊은 도시 라이프찌히에서 직선거리로 약 70킬로미터 남쪽에는 쯔비카우(Zwickau)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1900년대 초부터 독일의 자동차 산업을 주도하던 곳 중의 하나였다. 동독 시절에는 이곳에서 ‘트라반트’라고 하는 자동차를 생산했다. 그렇다면 쯔비카우는 연기를 뿜는 산업도시일까? 사실은 오랜 역사와 연륜이 곳곳에 스며있는 도시이다.
쯔비카우 시가지 한가운데에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Dom St. Marien)의 첨탑이 고풍스런 도시의 지붕선 위로 높이 솟아있다. 이 성전의 기원은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1518년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되어 1522년 마르틴 루터가 와서 설교한 적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연결된 시장광장 한쪽 편에는 상념에 잠긴 듯 앉아있는 자태의 슈만의 동상이 어린이 분수(Kinderbrunnen) 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노는 모습을 묘사한 이 분수의 조각은 슈만의 작품 《어린이 정경》을 연상하게 한다.
시장광장 서쪽에 있는 로베르트-슈만-하우스(Robert-Schumann-Haus)는 슈만이 태어나 7살 때까지 살 던 집을 당시의 모습대로 재건축한 것이다. 이곳에는 슈만과 클라라의 피아노, 초상화, 사진, 자필 악보, 거의 300통에 달하는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 슈만의 어린 시절 초상화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 초상화를 바라보면 어디선가 <트로이메라이> (Träumerei 꿈) 선율이 조용히 들려오는 것만 같다.
슈만이 이 집에서 태어난 것은 1810년 6월 8일. 그는 조그만 출판사를 경영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지성적인 가정환경 속에서 음악을 접하면서 자랐는데 7살 때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고, 11~12살 때는 이미 피아노곡, 합창곡, 관현악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그는 음악보다는 낭만주의 문학 작품에 더 심취했다. 13살 때부터는 아버지가 발간하는 잡지에 작가와 예술가들 프로필 쓰는 일을 맡았고, 자신의 시를 모아 출간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격동의 순간이 다가왔다.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이며 저능아였던 누나 에밀리가 죽고, 이어서 아버지도 정신질환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소년 슈만은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 번민했다. 그는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풍랑이 휘몰아치는가”라고 괴로워하다가 “풍랑은 잠잠해졌다. 파도는 차츰 가라앉는다. 나는 이제 나의 생애에 대한 비전을 더욱 선명하게 본다.”라고 일기에 썼는데, 이 말은 예술가로서의 길을 걸으리라는 결심으로 볼 수도 있겠다.
아버지와 달리 그의 어머니는 매우 현실적이며 아들에 대해 엄격했다. 그녀는 아들의 확실한 미래를 위해 그를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법학교수 티보가 가르치는 하이델베르크로 대학을 옮겼고, 티보 교수는 그에게 그가 갈 길은 법학이 아니라 음악이라는 것을 깨우쳐주었다.
슈만은 다시 라이프찌히로 돌아가 저명한 피아노 선생이던 비크(F. Wiek)의 집에서 기숙하면서 피아노 레슨을 받지만 손가락을 혹사한 결과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되자 피아노는 단념하고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스승 비크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승의 어린 딸 클라라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녀와 결혼하게 되는 1840년까지 많은 피아노곡을 쓰게 된다. 이 시기의 작품 속에는 작곡가로서 슈만의 독창성이 매우 돋보이는데, 그 중에는 13곡으로 구성된 피아노 모음곡 《어린이 정경》도 포함된다.
어린이를 위한 음악은 많지만 이 작품만큼 동심의 세계를 따뜻하게 그려낸 음악은 드물다. 이 작품은 슈만이 28세이던 1838년에 완성했으니까 클라라와 열애하던 시절의 작품이다. 따라서 자기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향에서 보낸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상태에서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꿈꾸는 듯한 아름다움과 시정(詩情)이 듬뿍 넘쳐흐르는 <트로이메라이>는 《어린이 정경》의 일곱 번째 곡으로 슈만의 작품 중에서 가장 청순하고 서정적인 곡으로 평가된다.
글·사진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역사, 언어 분야에서 30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했으며 국내에서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동유럽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외에도 여러 권 있다. culturebox@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