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속리산(俗離山)은 1,058m의 천왕봉을 비롯하여 9개의 봉우리가 있어 구봉산이라고 불렸으나 신라 때부터 속세를 떠나온 산 즉, 속리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진흥왕 14년(553년)에 의신조사가 천축국에서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돌아와, 기암 괴석이 가득한 절경에 비범한 기운이 있는 이곳에,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는 뜻의 법주사를 창건하였다. 이후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이곳에서 길상초를 발견하였고, 진표의 법을 받은 영심스님이 중창하고 길상사라 하였다.
신심이 돈독하여 세 왕자를 출가시킨 고려 문종의 아들 중에 대각국사 의천과 혜덕왕사 소현의 동생인 도생 승통이 주지로 있을 당시에는 3만 명의 승려가 모일 정도의 대가람이었다. 공민왕 12년(1363년)에 왕이 부처님 사리 1과를 통도사로부터 법주사에 가져오도록 하여 지금 능인전 뒤쪽에 사리탑이 있다. 고려시대에 속리사라고 불렸고, 조선시대 ‘동문선’에도 속리사가 나오며, 이후 법주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 세조 때에도 세조의 스승 신미대사가 머무르며 성장했던 법주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전소되어, 사명대사와 벽암대사가 중창하였다. 벽암대사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과 함께 바다에서 활약한 의승장이며 인조 때 남한산성을 쌓은 스님이다.
법주사는 국내 유일의 목탑 팔상전을 비롯하여 쌍사자 석등, 석련지, 사천왕 석등, 대웅보전 등 귀중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팔상전은 22.7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목조탑이다. 두 단의 석조 기단과 돌계단은 통일신라 때의 것이며, 그 위는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사명대사와 벽암대사가 재건하였는데, 이전의 3칸에서 5칸으로 외형을 키웠다. 내부 정중앙에는 5층 전체를 받치는 중심기둥이 서 있고 기둥 사면에 석가여래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가 두 폭씩 그려져 있다.
팔상전 뿐 아니라 대웅보전도 2층 건물로 상당히 거대한데,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더불어 3대 불전의 하나로 꼽히며 역시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이다. 안에는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국내 소조불좌상으로 가장 큰 삼존불이 안치되어 있다. 또한 원통보전은 드물게 정사각형 건물에 사모지붕을 얹은 건물인데, 목조관음보살을 모셨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축조를 위해 당백전을 주조한다는 이유로 장륙상을 압수하면서 사라진 용화보전 자리에는 시멘트와 청동불상 단계를 거쳐 현재는 33m의 금동미륵입상이 복원되어 있다.
쌍사자 석등은 남북국시대에 신라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성덕왕 19년(720년)에 조성된 우리나라 독창적인 양식의 조형물이다. 불교에서 사자는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인데, 부처님의 진리를 상징하는 석등을 사자가 높이 치켜들어 불법이 사방으로 널리 퍼져나가도록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석련지는 8세기 통일신라의 연꽃 모양으로 당시에 물을 담아 연꽃을 띄워 두던 조경석이다. 팔각형 기단에 구름모양의 동자석이 있고 그 위에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의 거대한 몸돌을 받치고 있는데 겉면 아래는 작은 연꽃이, 위에는 큰 연꽃 무늬가 부조되어 있다.
이 밖에도 사리각 옆 추래암 암벽에는 마애여래의상이 시원스레 조각되어 있고,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희견보살상 조각과 3천 명이 먹을 장국을 끓였다는 철확, 세조의 연이 통과하도록 스스로 가지를 들어올렸다는 정이품송 등 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법주사는 명실공히, 호서 제일의 가람이요, 미륵 신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다.
글 ㅣ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