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촉사, 사진 논산시청
관촉사, 사진 논산시청

 

[아츠앤컬쳐] 논산의 비옥한 평야 가운데 반야산 기슭 관촉사에는 거대한 미륵불입상이 서 있다. 968년(고려 광종 19)에 한 아낙네가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고 있었는데,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려 가보았더니 아기는 없고 큰 바위가 땅속으로부터 솟아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소식은 곧 조정에 보고되었는데, 고려 왕실에서는 왕권 강화와 멸망한 후백제 지역 백성의 마음을 달래고자, 저명한 승려 조각장 혜명(慧明)에게 이 바위로 불상을 조성하도록 명하였다.

관촉사 경내
관촉사 경내

혜명은 백여 명의 장인들과 함께 37년에 걸쳐 불상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거대하여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화현하여 동자 모습으로 나타나 세 조각으로 된 진흙 불상을 만들고 모래를 경사지게 쌓아 중간과 윗부분을 경사로로 올리며 놀았다. 이에 힌트를 얻은 혜명은 같은 방법으로 불상을 세웠다. 실제로 보살 입상의 발 부분은 직접 암반위에 조각된 것이며, 그 위에 허리의 아래부분, 상체와 머리부분을 올려 연결한 모습이다.

불상이 서자, 하늘에서 큰 비를 내려 불상을 씻어주고 서기가 백 일 동안 어리며 미간의 옥호에서 빛이 사방을 비추었다. 중국의 승려 지안이 이 빛을 좇아와 예배하였는데, 그 빛이 촛불과 같다고 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라 지었다. 고려 말 승려 무외의 용화회소」와 조선 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 이색의 「목은집」 등에 이 석불입상의 기록이 남아 있다.

해탈문
해탈문

관촉사 출입구에 해당하는 해탈문은 불상을 보고 법회를 드리려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므로 일부러 문을 낮고 좁게 만들어, 누구든지 고개를 숙이고 몸과 마음을 낮춰서 경건하고 안전하게 드나들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한다.

미륵전 앞으로 일직선 상의 석탑, 석등, 미륵불
미륵전 앞으로 일직선 상의 석탑, 석등, 미륵불

광종이 논산에 거대한 석조불상을 조성한 이유는 후백제 신검이 마지막으로 항복한 장소에 건립한 태조 왕건의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 때문이다. 광종은 개태사보다 훨씬 큰 불입상을 조성하여 아버지 왕건 못지않은 권위를 과시하려 한 것이다. 이 불입상은 지역 이름을 따서 은진미륵(恩津彌勒)이라 불리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18.12m이며,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의 대표작으로 토속적이며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고 있다. 

대웅전 삼존불상
대웅전 삼존불상

머리 위로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면류관형 이중 보관을 쓰고 신체의 비례도 맞지 않아서 한때는 졸작이라 폄하 받았으나, 현재는 독창적인 조형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우리나라 불교신앙과 조각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은진미륵, 사진 논산시청
은진미륵, 사진 논산시청

은진미륵에는 얽힌 영험담이 많다. 한번은 북쪽에 오랑캐의 난이 일어나 적병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이 불상이 노립승으로 현신하여 옷을 걷고 강을 건너자 적병들도 따라 건너다가 과반수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러자, 화가 난 오랑캐 장수가 칼로 쳐서 삿갓이 약간 부러졌다고 한다. 사실인지 은진미륵의 보관에는 부서져 수리한 흔적이 남아 있다. 또 나라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서기가 어리며, 난리가 나면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는다는 전설 등이 전한다.

석등
석등

은진미륵 정면에 창건 당시 같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석등은 원통형 기둥 위에 불상의 이중 면류관과 같이 이층 화사석 사각구조로 창이 넓고 시원하다. 이어 미륵불, 석등과 일직선상에 놓인 석탑 아래로 입체감이 뚜렷하고 선명한 세 송이 연화 배례석은 창건 시 조성된 것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원형이 그대로 살아 있는 걸작이다.

배례석, 사진 논산시청
배례석, 사진 논산시청

2월 중 찾은 관촉사는 한창 정기점검으로 공사 중이어서 은진미륵을 보지 못하고 왔는데, 공사는 올 8월쯤에 마칠 예정이라고 한다.

석탑과 배례석. 석탑 상륜부가 사라졌다
석탑과 배례석. 석탑 상륜부가 사라졌다

 

글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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