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미학, 자연과 인간미의 서사적 만남

권옥연, 부인의 초상, 1951, 캔버스에 유채, 91.5×59cm
권옥연, 부인의 초상, 1951, 캔버스에 유채, 91.5×59cm

 

[아츠앤컬쳐] 권옥연(1923~2011) 화백은 생전에 ‘한결같은 중후함과 삶의 진정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에 ‘난 아직 부족해’라는 말씀을 달고 살았다. 항상 깊은 사색의 모습과 선문답처럼, 일상의 삶을 관조하던 음유시인이자 낭만화가의 대명사였다. 그 권옥연 화백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마련된다. 그동안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등 국민화가들의 회고 기념전을 열었던 현대화랑이 이번엔 권옥연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각 시대의 화색(畵色)을 대표했던 20점으로 회고 기념전을 개최하는 것이다.

흔히 어스레한 미명의 ‘권옥연 그레이’로 잘 알려진 특유의 회색빛 풍경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특히 회색 풍경 이전의 1950년대 초반 작품부터 작고 직전의 작품까지 만날 수 있어서, 권 화백 작품 성향의 전개 과정을 한눈에 비교할 수 있겠다. 권옥연 화백의 그림은 회색 톤임에도 창백하거나 차갑지 않고, 오히려 은은한 감성적 미열의 여운처럼 따뜻한 위로를 전한다. 권옥연 회색미학의 출발은 프랑스 파리였다.

권옥연_몽마르트 거리 풍경_1957_100x65cm
권옥연_몽마르트 거리 풍경_1957_100x65cm

권옥연 화백은 1957년 35세 되던 해에 파리 유학길에 오른다. 유럽에서 2차세계대전의 상흔을 표출해낸 추상주의 운동인 ‘앵포르멜(Informel)’, 권 화백 역시 한국전쟁을 경험했기에 유학 초기엔 자연스럽게 그 영향을 받게 된다. 하지만 기존의 모더니즘 미학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며 앵포르멜을 추구했던 유럽 작가들의 감성까지 닮을 수는 없었다. 자신만의 고유한 자각의 독립된 조형적 의식을 찾아 나선다. 고분 벽화나 민속적 요소, 할아버지에게 배웠던 한자 습자(習字)의 경험 등 떠나온 고향에 대한 기억들은 권옥연만의 조형성 기반을 다지는데 좋은 길라잡이였다. 이러한 자신만의 시도를 ‘정적인 앵포르멜’로 여겼다.

권옥연_절규_1957_80.3x116.8cm
권옥연_절규_1957_80.3x116.8cm

가령 프랑스로 건너간 첫해에 그린 작품 <절규>(1957)가 좋은 예이다. 어떤 구체적 형상으로 특정할 수 없는 모호한 형태와 거친 질감의 표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치 야생동물을 모티브로 한 상형문자 도상은 입을 크게 벌리고 울부짖는 절실함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여기에 특유의 중성적인 색채와 추사체(秋史體) 풍의 굵직한 붓 터치가 어우러져 화면의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이처럼 지속된 권옥연 화백의 조형적 실험 의지는 유럽에서도 큰 호평을 받았다.

1960년대 귀국 후 선보인 그의 작품들은 당시 자생적으로 한국적 앵포르멜 운동을 전개하던 국내의 청년 작가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제가 된다. 민속적 소재와 감성에 기반하되,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재해석한 순수원형의 탐구와 초현실적 환상을 새롭게 창조해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회복과 체험적 감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였다는 점도 한 몫이었을 것이다.

권옥연_귀향_1999_130.6x162cm
권옥연_귀향_1999_130.6x162cm

또한 1970년대 <우화>나 <탈(전설)>, 1980년대 <옛이야기>와 <달맞이꽃> 등은 한국적인 정서의 신화와 설화의 이미지로 출발했지만, 문학적 상상력까지 더해진 권옥연만의 주제 의식을 돋보여준다. 물론 1990년대 이후에도 ‘무제’ 혹은 <귀향>처럼 은유적이고 시적인 한편의 문학작품을 함축해놓은 듯한 지속적인 화풍은 이어진다. 그래서일까, 권옥연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녀’나 ‘여인’시리즈의 인물들도 어느 책 속의 주인공처럼 유독 정적이고 차분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권옥연_여인_1988_91x65.5cm
권옥연_여인_1988_91x65.5cm

권옥연의 ‘여인’시리즈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포즈’와 ‘시선’이다. 대개 젊은 여성을 그렸음에도 안정된 자세와 차분한 시선 처리로 주인공의 내면적 격조까지 드러내고 있다. 젊음의 에너지에 버금가는 에로틱한 이미지 대신, 그 여인이 품고 있는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신비롭게 감추고 있는 점은 탁월한 선택이다. 여기에 화면 전반적으로 회색빛이 감돌아 좀 더 중의적인 해석과 감상 기회를 배려해놓고 있다. 권옥연 화풍의 색조와 독창적인 조형적 미감이 잘 조화를 이룬 본보기다.

권옥연 화백
권옥연 화백

이번 ‘권옥연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맞아 문득 “화가는 정신연령이 다섯 살 넘으면 그림을 못 그린다”라며, 입버릇처럼 ‘작가적 순수성’을 강조했던 권 화백의 말이 되새겨진다. 한평생 예술의 멋과 풍류가 함께 하는 삶의 격이 무엇인지 보여줬던 예술가 권옥연! 원시적 체취가 물씬 배어 나오는 작품에서 향토적 소재주의, 목가적 서정주의, 절제된 색감과 화면구성, 상상과 무의식의 초현실적 조화를 이룬 작품 세계…. 결국 권옥연 화백의 작가적 삶은 자연과 인간미의 서사적 만남을 어떻게 한국적 미감으로 되살려낼 것인가에 대한 천착이었다.

 

글 | 김윤섭

명지대 미술사 박사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아이프aif 미술경영연구소 대표
정부미술은행 운영위원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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