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경계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경계는 이곳과 저곳을 구분하는 동시에 만나는 곳이다. 또한 생성과 변화의 에너지가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나’라는 창작의 주체가 인위적인 행위로 작업하지만, 그 행위를 통해서 자연이란 원초적인 요소를 다룸으로써 화면이란 가상공간에 창조적인 또 다른 자연을 구현해낸다. 마치 태초의 세상이 열리고, 음과 양의 조화, 오행의 상극과 상생에 의해서 자연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채성필의 작업은 흙에서 시작해서 흙으로 정리된다. 흙이란 재료는 가장 근원적인 공간에 대한 물음의 답을 찾는 최적의 요소이다. 채성필의 그림은 화면 안에 만들어지는 또 하나의 창조적 자연의 형태를 보여 준다. 채 작가의 작업은 크게 흙과 물 시리즈로 나눠볼 수 있다. 원초적 형태의 대지가 연상되거나, 최소한의 생명력이 돋아난 듯한 황색과 녹색 작품들에 비해, ‘물’ 시리즈는 고유한 청색 톤으로 일관된다.
채성필에게 블루는 ‘대지를 품은 바다’이고, ‘땅의 역사를 지켜본 하늘’이다. 마치 하늘 위에서 본 물의 흐름을 시각화한 듯한 조형 어법이 인상적이다. 대지를 핏줄처럼 가르는 물길들을 그대로 생명의 줄기와 같다. 그것은 하루하루의 변화되는 시간의 기록이며, 쌓여가는 우리의 역사를 대변한다. 캔버스 위에 물감 대신 흙을 뿌리고,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 체온까지 스며 있어 맥박의 리듬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대학 시절 우연히 흙에 빠져든 채 작가는 한국화와 서양화의 경계를 넘나들고, 동서양의 미감을 융합시킨 독창적인 그림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얻고 있다. 특히 그의 그림은 2천 년 전의 고구려벽화나, 삼국시대 단청, 수천 년 전의 고대 인류도 사용했던 흙이란 그림 재료를 가장 현대적으로 재활용한 롤 모델로 여겨진다. 전통적인 재료 기법을 떠나 보는 재미와 읽는 재미의 다양한 조형적 요소들이 함축된 덕분이다. 채성필 작가가 새로운 신작으로 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신년 첫 기획초대전을 이번 달 11일부터 다음 달 27일까지 갖는다.
물의 초상, 익명의 땅, 대지의 몽상, 흙과 달 등의 작품 제목으로 그동안 천착해온 ‘흙의 파노라마’를 선보인다. 채성필은 한 화면에 여러 색을 한꺼번에 사용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한국화를 전공하며 체득한 ‘수묵정신’의 실천이기도 하다. 가령 동양에선 수천 년에 걸쳐서 ‘먹’(墨)이라는 한 가지 재료로 세상의 모든 색을 품은 ‘현(玄) 정신미학’을 구현해왔다. 채성필에게 흙은 모든 본질적 근원이자 생명의 시작점인 동시에, 만물의 색을 품은 먹과 같은 역할의 존재와 같다.
특히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흙과 달>이라는 작품에 담아냈다. 마치 작업실 창을 통해 바라본 보름달처럼, 그 안의 흙과 대지에 스민 그리움의 기원은 우리의 마음속에 담긴 이상향에 대한 노스탤지어(nostalgia)와 다름없을 것이다. 결국 채성필의 그림은 익명의 땅으로 시작해 대지에서의 몽상을 거쳐, 자연 속 물길의 역사를 따라 오늘과 내일을 걷고 있는 셈이다. 또한 모든 생명이 지닌 생성과 변화의 에너지가 머무는 경계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채성필(1972~) 작가는 서울대학교 학부와 대학원의 한국화 학과를 거쳐, 프랑스 렌느2대학 조형예술학 석사과정을 졸업했으며, 파리1대학 조형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천연에서 채취한 흙에 기본 안료를 섞어 단색조 회화 작품을 일관되게 선보이고 있다. 그동안 서울, 파리, 두바이, 뉴욕, 제네바, 룩셈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등 국내외에서 20회 이상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영은미술관, 세종시정부청사, 카카오다음, 보령제약, 신한은행, BNP은행, 파리시청, Cernischi 미술관, 마제스틱호텔, 씨트로엥본사 등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는 반 고흐가 잠든 프랑스 Mery sur Oise 작업실에 거주하며 활동 중이다.
글 | 김윤섭
명지대 미술사 박사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아이프aif 미술경영연구소 대표
정부미술은행 운영위원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