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이탈리아 북동부 해안의 휴양 도시 리미니(Rimini)에서 산 마리노(San Marino) 행 국제선 버스정거장에 섰다. ‘국제선’이라? 실감이 나지 않는다. 거리로 따지면 리미니 교외 조그만 도시에 가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말이다. 하긴 산 마리노는 이탈리아 영토 안에 있지만 이탈리아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엄연한 독립국이다. 산 마리노의 인구는 33,000명 정도이고, 면적은 여의도의 두 배 정도로 유럽에서 바티칸, 모나코 다음으로 세 번째로 작은 나라이다.
구름 위에 떠있는 동화의 나라 같은 이 소국의 중심은 자유의 광장이다. 이곳의 첫인상은 여느 이탈리아 도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만 지저분하거나 빈곤한 구석이라고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고 건물과 길들이 매우 깨끗하고 전반적으로 부유한 티가 난다. 사실 산 마리노는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달러가 넘는다. 그중 관광수입이 50% 정도 차지하는데,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은 일 년에 3백만 명이 넘는다.
자유의 광장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과 산 마리노의 정부청사인 팔랏쪼 푸블리코(Palazzo Pubblico)는 구름에 휩싸였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동화의 나라 같은 이곳에는 왕도 왕자도 공주도 없다. 이곳은 왕국이 아니라 민주 공화국이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모범적인 민주공화국이다. 사실 1861년 미국의 링컨대통령이 산마리노의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여러분들의 나라는 비록 작지만 역사에서 가장 칭송받는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라고 산 마리노의 정치체제를 칭송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럼, 산 마리노는 언제 어떻게 건국되었으며, 또 어떻게 해서 이탈리아 영토 안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로마제국 후반기인 3세기 말경 랍(Rab: 현재 크로아티아 서해안의 섬)에서 건너온 마리누스(Marinus)라는 석공이 있었는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리미니에서 일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전파했다. 그러던 어느날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대대적으로 가해지자 마리누스는 그를 따르는 기독교 신자들과 함께 아펜니노 산맥에 있는 해발 750미터쯤 되는 높은 바위산 위로 피신했다. 이들은 속세와 완전히 단절된 이곳에서 부락을 이루고 살면서 조그만 성전을 짓게 되는데 그날이 301년 9월 3일이었다. 이날이 바로 산 마리노의 건국일이 된 것이다. 한편 산 마리노는 성자 마리누스를 이탈리아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산 마리노는 그 후에도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공동체를 유지해 왔으며 1631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도 독립국으로 승인을 받았다. 그후 외부세력들이 산 마리노를 그냥 두었던 것은 아니지만 산 마리노는 용케도 독립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1870년에 신생 이탈리아 왕국이 마지막까지 버티던 교황청도 흡수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완전히 통일했는데 산 마리노는 어째서 이탈리아에 흡수되지 않았을까?
1800년대 전반 이탈리아에서 통일운동이 시작될 때 통일전사들이 피신을 다녔는데 산 마리노는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가리발디 장군의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가리발디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산 마리노의 바람에 따라 통일 이탈리아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해주도록 했던 것이다. 또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도 산 마리노는 민주공화국의 표본이기 때문에 그대로 존속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자유의 광장에서는 산 마리노 공화국의 국기가 휘날린다. 국기 한 가운데에 라틴어로 ‘자유’라는 뜻의 리베르타스(LIBERTAS)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국기의 하부는 하늘색, 상부는 흰색으로 되어있는데, 하늘색은 하늘을, 흰색은 자유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이곳은 하늘 위에서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나라라는 뜻이리라.
글·사진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역사, 언어 분야에서 30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했으며 국내에서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동유럽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외에도 여러 권 있다. culturebox@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