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배의 드로잉 기록, 우연과 의도 사이를 오가다
[아츠앤컬쳐] 오원배 작가는 주로 ‘인간 실존’에 대한 테마를 장엄하고 독창적인 조형어법으로 발표해온, 한국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치의 중진 작가이다. 동국대학교 미술학과에 30년 넘게 재직하는 동안 방학이면 조용한 사찰에 머물며, 정신적 수행과 실천을 드로잉 작업으로 풀어내는 등 불교적 정신성을 작품에 담아내는 활동으로도 주목받았다. 가령 강화도의 대표 사찰인 전등사에도 오원배 작가의 작품이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인 전등사 무설전의 주불(主佛) 뒤의 특별한 후불탱화가 오원배 작가의 작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전등사 무설전의 후불벽화는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린 것이다. 흔히 프레스코 기법은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같은 서양미술 거장들이 성당의 벽화를 그릴 때 사용한 기법으로 알려졌는데, 그보다 훨씬 오래전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사용된 바 있다. 오원배 작가 역시 이미 30대 전후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프레스코 기법을 천착해 꾸준히 회화 작업에 접목해왔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사찰 벽에 최초로 프레스코 기법을 적용한 후불벽화의 탄생은 오원배 작가의 불교에 대한 신념과 정진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드로잉은 살아있는 생물이며 스스로 증식한다. 드로잉은 상상의 기록이다. 드로잉은 비현실을 현실화하는 일체의 과정을 기록하는 행위이다. 사유와 상상을 자극하는 일체의 행위와 기록이다. 드로잉은 사유와 상상이라는 살을 뼈에 바르는 행위이다.”
오원배 작가의 말처럼, 그는 평소에 드로잉 작업에 몰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드로잉 작품엔 작가적 관점과 신념이 고스란히 담겼다. 작업실 한쪽에 가득한 크고 작은 수백 권의 드로잉북은 평생 창작자로서 삶의 기록이고, 진심의 반증일 것이다. 습관처럼 몸에 밴 ‘화가의 기록’을 통해 세상의 다양한 표정을 읽어내고 있다. 오원배 작가의 신작 드로잉이 <기록, 우연과 의도 사이>라는 제목으로 청담동 호리아트스페이스에서 이달 22일까지 선보이고 있다.
<기록, 우연과 의도 사이>라는 제목에서도 짐작되듯, ‘오원배의 기록’인 드로잉 작품에는 우연성과 의도성이 중첩되어 있다. 아주 평범하면서도 쉽게 읽히는 듯한 드로잉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치열한 작가적 실험정신의 산물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화면의 바탕에 올려진 재료들은 본래 재질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없다. 나름의 방식으로 혼용해 자신만의 특별한 질감과 밀도감을 얻어낸 장인정신이 돋보인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을 대하듯, 매번 드로잉 작업 순간순간에 ‘의도된 즉흥성’을 가미해 이상적인 조형성과 여백미를 조율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드로잉은 색채보다는 선(線)에 의해 어떤 형상이나 이미지를 그려 내는 수단을 일컫는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원화를 제작하기 전에 시험 삼아 여러 기법이나 표현법을 연구하는 대안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오원배 작가에게 드로잉은 그 자체로 독립된 작품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화면의 구도나 구성, 재료의 선택과 기법 등 오랜 시간 폭넓은 창의적이고 조형적인 실험의 경험에서 얻어진 결과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오원배의 드로잉 전시는 그리는 방식의 다양한 매력과 깊이를 가늠해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제공한다.
서울대 명예교수인 정영목 평론가는 “‘드로잉은 화가가 발견한 어떤 사건-그것을 보았거나, 아니면 기억과 상상을 통해서-의 자전적 기록이기도 하다’는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에 덧붙여 오원배의 드로잉은 ‘촉각적인 자전적 기록’이라 부르기를 원한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만큼 오원배 작가의 드로잉은 삶을 관통해낸 관조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는 해석으로 이해된다. 그의 촉각적 몸짓은 ‘사유와 상상을 자극해낸 기록’인 셈이다. 외줄을 타듯, 우연과 의도의 경계를 미묘하게 오가는 오원배의 드로잉 작품들에선 그의 잠자던 새로운 감성을 만나게 된다. 또한 “오원배의 기법은 우리 현대미술사에 기록할 정도의 탁월한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평가한 정영목 평론가의 안목을 확인하게 된다.
오원배(1953~) 작가는 동국대학교 미술학과 및 동대학원을 마치고, 파리국립미술학교를 수료했다. 1984년 파리국립미술학교 회화 1등상, 1985년 프랑스예술원 회화 3등상, 1992년 올해의 젊은 작가상, 1997년 제9회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이달의 작가전’(1989), 금호미술관(2003/2012), 여수 예술마루 장도전시장(2021), 인천아트플랫폼(2023) 등에서 21회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80년 ‘표상 4313’전을 시작으로, 살롱 도톤느(1983), 살롱 드메(1986), ‘젊은 모색’(국립현대미술관, 1987), 까뉴국제 회화제(1992), ‘한국미술 '95:질량감’(국립현대미술관, 1995), ‘회화의 복권’(국립현대미술관, 2001), ‘재난과 치유’(국립현대미술관, 2021), ‘인공윤리’(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2022), ‘그림의 탄생’(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22) 등 국내외 300여 회의 기획 단체전에 참가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인천문화재단, 프랑스 문화성, 파리국립미술학교, 동국대학교, 서울대학교, 원광대학교, 인제만해마을, 전등사, 해인사, 정토사, 후쿠오카 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동국대학교 미술학부에서 1986년부터 2017년까지 재직 후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글 | 김윤섭
명지대 미술사 박사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아이프aif 미술경영연구소 대표
정부미술은행 운영위원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