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고뇌의 로망스

[아츠앤컬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인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깊고 큰 눈동자이다. 흔히 눈을 ‘영혼의 창’이라 하고 눈동자에서 다양한 정서적 반응을 읽어낼 수 있다 하는데 이 때문인지 아름다운 눈과 눈동자에 대한 칭송은 시인들과 음악가들의 작품 속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우크라이나 시인이자 작가인 예브게니 그료빈카(Yevgeny Pavlovich Grebyonka) 역시 1843년 ‘검은 눈동자’에 관한 시를 썼는데 이로부터 40년 후 독일 태생의 러시아인 플로리안 헤르만(Florian Hermann)이 곡을 붙이며 러시아를 대표하는 노래로 알려지게 되었다.

“검은 눈동자, 불타는 눈동자, 정열의 눈동자 그리고 아름다운 눈동자여!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경외하는지! 아마도 서로 좋은 때에 만난 것은 아니었네. 차라리 그대를 몰랐더라면 아파하지 않을 것을, 평안 속에 온전히 살 수 있으련만. 그대는 나를 파멸시켜버렸네, 검은 눈동자여, 나의 행복을 영원히 앗아갔다네!”

러시아의 카루소로 불리는 베이스 샬리아핀(Feodor Ivanovich Chaliapin)의 목소리는 신비롭고 강렬한 눈동자의 여인에게 빠진 한 남성의 열정과 고뇌를 더할 나위 없이 멋지게 표현한다. 샬리아핀은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망명하여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였는데 그 덕분에 이 노래는 가장 유명한 러시아 가요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는 오페라뿐 아니라 ‘검은 눈동자’를 위시한 러시아 가요나 민요들을 탁월한 표현법으로 노래하며 러시아의 오랜 음악적 전통을 만방에 심어주기도 했다.

Feodor Ivanovich Chaliapin
Feodor Ivanovich Chaliapin

특히 ‘검은 눈동자’는 격정적이고도 호방하며 호소력 넘치는 러시아 특유의 가락이 인상적인데 이러한 가락들을 통틀어 집시 로망스(gypsy romance)라 부른다. 이는 러시아에서 발전한 집시풍의 노래들로, 전 세계로 흩어진 집시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정착지의 음악에 접목시키며 다양한 음악으로 발전시켰다.

집시들의 춤과 노래에서 유래된 스페인의 플라멩코(flamenco)나 찌고이네르바이젠(Zigeunerweisen)과 같은 집시 바이올린, 러시안 로망스 그리고 월드음악 분야를 섭렵한 발칸 밴드음악 등이 바로 이러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독특한 음계와 창법 그리고 바이올린, 심발롬(cimbalom), 클라리넷, 팬플루트, 아코디언 등 다양한 악기들을 사용하여 청중을 사로잡으며 전통적 지역음악에 이국적 정서를 더하여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감각을 발휘하였다. ‘검은 눈동자’는 우크라이나와 독일계 러시아인의 영감으로 탄생한 곡이지만 그 바탕에는 동유럽에 흡수된 집시들의 열정과 감각이 다분히 흐르고 있다.

러시아적 정념과 팜므 파탈을 연상시키는 ‘검은 눈동자’는 수많은 영화와 영상물의 주제곡으로도 사용되었는데 먼저 1947년 영화 <잇 해펀드 인 브룩클린>과 1966년 <배트맨> 이외에도 2000년대 이후 <초콜릿(2000)>, <호스텔(2005)>, <이스턴 프라미스(2007)>, <브레스트 요새(2010)>,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 등 다양한 작품에 쓰였다.

또한 음악과는 별개로 제목으로 차용된 니키타 미할코프(Nikita Mikhalkov) 감독의 <검은 눈동자(1987)>는 이탈리아의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Marcello Mastroianni)에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줌과 동시에 러시아 여인의 깊고도 신비한 눈동자를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러시아의 오랜 전설은 집시들이 원래 새였다고 한다. 정처 없이 날아 세상 어디서고 방랑의 음악을 전하는 집시의 로망스. 그 노래 안에 담긴 여인에 대한 사랑과 열정, 희열과 고뇌는 비단 러시아인들에게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방랑과 자유의 날갯짓을 들려준다.

글 | 길한나
보컬리스트, 브릿찌미디어 음악감독,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stradak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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