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에 남겨둔 기억의 회로
때로는 긴 설명보다 오히려 짧은 감탄사가 더 많은 것을 표현할 때가 있다. 긴 말은 본질을 흐릴 수 있지만, 침묵은 본질에 다가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노래도 마찬가지여서, 수많은 미사여구보다는 짧은 여음구가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흔치는 않지만 가끔은 ‘나나나, 랄랄라’와 같은 단순한 스캣(scat)이 노래의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데, 스캣이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깊이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6~70년대 샹송의 세계화에 기여한 <라 마리짜>가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라 마리짜>는 실비 바르땅(Sylvie Vartan)의 망향의 정서를 표현한 노래다. 샹송계의 베테랑인 피에르 들라노에(Pierre Delanoë)와 쟝 르나르(Jean Renard)가 작사, 작곡한 <라 마리짜>는 바르땅의 1968년 앨범인 ‘Sylvie Vartan(La Maritza)’에 수록되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불가리아 태생의 프랑스 여가수인 바르땅은 어린 시절, 부모의 손에 이끌려 공산체제를 피해 파리로 망명했는데, <라 마리짜>의 가사에는 이러한 기억들이 은유적으로 담겨있다. 내용은 언뜻 느끼기엔 마리짜 강변에서 노닐던 유년기의 추억들을 좇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 추억과 함께 자유와 망명, 조국에의 그리움과 회한 등 내면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라 마리짜>에 담긴 바르땅의 이야기는 슬라브인의 호소력이 묻어나는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진실을 말하기 위해 오히려 상상의 여지를 남겨둔 듯하다.
“세느(Seine)가 당신의 강이듯 마리짜는 나의 강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만이 가끔씩 그때를 회상하죠.
첫 10년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아요. 볼품없던 인형조차도.
그저 오래된 짧은 후렴구만이 남았을 뿐이죠.”
랄랄라의 흥얼거림으로 시작되는 <라 마리짜>의 후렴구는 향토색 짙은 슬라브 가락의 색채를 드러낸다. 분위기는 사뭇 다르나 헝가리 태생의 프랑스 작곡가 코즈마(Joseph Kosma)의 <고엽(Les Feuilles Mortes)>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코드와 멜로디의 유사성 때문이다. 실제로 <라 마리짜>는 코즈마 측의 출판사와 표절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독자성을 인정받았다. 한편 <라 마리짜>의 슬라브적 색채는 형식 면에서도 두드러지는데, 바로 애잔한 절과 스캣이 교대로 반복되는 노래 형식이며, 이로 인해 러시아의 민요 <머나먼 길(Dorogoi dlinnoyu)>과 자주 비교된다. 그러나 향토색에 기인한 여러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라 마리짜>는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바르땅의 가창력과 흡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녀의 노래에는 기억과 기억의 산을 넘어, 피안의 경지에서 울려나는 메아리가 있었으며, 대중은 그 속에서 망향의 몸부림과 사무치는 회한을 읽었다.
<라 마리짜>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후 민주화를 이룬 불가리아에서 바르땅의 목소리로 다시 불렸다. 38년 만에 조국을 찾은 그녀와 관중 사이에는 상상 속에서나마 아름답게 빛나던 마리짜 강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감동으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후렴구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불렀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엔 언제나 되새기고 곱씹을수록 향기처럼 피어오르던 고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글 | 길한나
보컬리스트, 브릿찌미디어 음악감독,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stradak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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