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초입에서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정서적 안정감이다. 서늘한 바람이 코끝에 와 닿으면 한여름의 무더위를 이겨낸 심신은 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한다. 높아진 하늘, 맑아진 공기, 싱그러운 숲의 풀벌레 소리는 일상에서 슬로우 템포의 가치를 깨닫게 하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도시를 바라보면 어느새 톤 다운된 의복들이 눈에 들어온다. 매번 아이스와 핫 사이에서 주춤대던 결정 장애도 사라지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바라게 된다.
맹추(孟秋), 중추(仲秋), 만추(晩秋)의 깊이가 모두 다르듯 각 시기에 어울리는 음악 또한 농도의 차이를 지닌다. 물론 아름다운 음악은 언제 들어도 좋지만, 계절과 시점에 맞춰 음악을 선택하는 것도 감상에 묘미를 더해준다. 초가을엔 역시 질리올라 친꿰띠(Gigliola Cinquetti)의 ‘Non ho l'età’가 적격인데, 잔잔하고도 달콤하며 인위적이지 않은 그녀의 목소리가 마음의 빈자리를 평온하게 채워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피아노의 분산화음 위로 흐르는 첫 소절은 풋사랑의 농도를 내비치며 초가을의청명함과 어우러진다. 또한 흑백 브라운관에서 발산되는 열여섯 질리올라의 청순함은 가사와 페르소나 간의 일치로 진정성을 느끼게 한다.
“난 너무 어려요, 당신을 사랑하기엔.
혼자 당신과 외출하기에도 어리죠.
아무 드릴 말도 없는걸요.
당신은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으니까요.
낭만적인 사랑에 빠지도록 놔두세요,
그날을 기대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아녜요.
혹시 날 기다린다면,
그날 내 모든 사랑을 갖게 될 거예요”
1964년 최연소의 나이로 ‘산레모 가요제’와 ‘유로비젼 송콘테스트’를 제패한 질리올라의 매력은 호수와 같이 잔잔한 감수성과 가창력이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는 물론, 베로나 국립음악원에서 음악이론과 성악 과정을 마친 그녀는 십대에 이미 방송계의 신동으로 불렸다. 수많은 가수들과 작업한 작곡가 살레르노(Nicola Salerno)와 판쩨리(Mario Panzeri)가 ‘Non ho l'età’의 가수로 질리올라를 지목한 것은 그녀의 재능과 스타성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그들의 예견대로 그녀는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가요제들을 휩쓸며 이탈리아의 위상을 드높였다.
가요제 직후 ‘Non ho l'età’는 벨기에의 Ultra 50, 프랑스의 InfoDisc, 이탈리아의 Musica e dischi에서 1위로 랭킹하며. 독일, 네덜란드, 노르웨이, 영국 등 주요 유럽차트를 모두 석권했다. 덕분에 4백만 장 이상의 싱글 판매고를 올리며, 질리올라는 플래티넘 디스크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후 ‘Non ho l'età’의 국제적 인기는 에널리 새리(Anneli Sari), 엘리 빌히암스(Ellý Vilhjálms), 레베카 팬(Rebecca Pan), 릴리 이바노바(Lili Ivanova), 샌드라 리머(Sandra Reemer) 등 유명 여가수들의 커버 행진을 몰고 왔다. 하지만 가창력이나 인지도와는 별개로 모두 질리올라의 아성을 무너뜨리진 못했다. 대중에게 있어 ‘Non ho l'età’는 질리올라 자체였으며, 일찍이 찾아온 사랑에 전하는 그녀의 달콤하고도 두려운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계절이 깃드는 무렵 모두에게는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미소로 혹은 한숨으로 앳된 추억과 마주하는 순간에 ‘Non ho l'età’가 흐른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소리 없이 다가와 우아하게 목례하는 가을이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미소 짓고 있음이 분명하다.
글 | 길한나
보컬리스트, 브릿찌미디어 음악감독,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stradakk@gmail.com
관련기사
- 라 마리짜 La Maritza
- 모나코 Monaco
- 포르 우나 카베사 Por una cabeza
- 라 팔로마 La Paloma
- 나의 고독 Ma Solitude
- 엘 콘도르 파사 El condor pasa
- 돈데 보이 Dónde voy
- 오 샹젤리제 Les Champs-Élysées
- 검은 눈동자 Очи чёрные
- 대니 보이 Danny Boy
- 바다의 노래 Cancao do mar
- 관따나메라 Guantanamera
-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날 El día que me quieras
- 장밋빛 인생 La Vie En Rose
- 리베르 탕고 Libertango
- Non, je ne regrette ri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