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후스 기념상과 미쿨라슈 성당
얀 후스 기념상과 미쿨라슈 성당

 

[아츠앤컬쳐] 유럽의 중원에 위치한 체코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배와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야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명으로 비로소 독립국이 되었으나 나치독일의 점령, 공산주의, 1968년 ‘프라하의 봄’, 1989년 벨벳 혁명 등을 거친 다음에는 1993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조용히 갈라지는 격동기를 거쳤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중심은 구시가지 광장이다. 이 광장은 11세기에 시장으로 조성된 이래로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둘러싸인 광장으로 변모되어 지금은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광장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광장에서는 프라하의 지붕선을 뚫고 하늘 높이 솟은 고딕 양식의 틴 성당이 엄숙한 모습으로 이곳 분위기를 지배하고, 합스부르크 왕가 지배 시대에 세워진 바로크 양식의 성 미쿨라슈 성당은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듯하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 광장은 고난과 격동으로 점철된 체코의 영욕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듯하다. 

당당한 모습의 얀 후스
당당한 모습의 얀 후스

이 광장 한쪽에는 얀 후스(Jan Hus 1369 ~ 1415)의 기념상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기념상은 얀 후스와 군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당당한 모습으로 홀로 우뚝 서있는 얀 후스는 틴 성당 쪽을 응시하고 있다. 그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어올리기 이미 100여 년 전에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피운 장본인으로 체코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위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사제이자 프라하 카렐 대학의 총장이던 그는 당시 라틴어 미사의 틀을 깨고 일반 대중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체코어로 미사를 집전했고, 체코어를 다듬고 체코어 철자법을 개혁했으며, 체코어 찬송가를 보급했다. 또한 그는 면죄부 판매로 부패한 교회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서면서 교회가 아니라 오로지 성서를 바탕으로 하는 진정한 기독교를 꿈꾸며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를 동조하는 사람들이 가난한 농민에서부터 부유한 귀족에 이르기까지 사회 각층으로 늘어나자 마침내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하고 1414년 11월 남부독일 콘스탄츠에서 열린 공의회에 불려갔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신변보장을 약속 받았기 때문에 공의회에서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려 했다. 하지만 신변보장 약속은 한갓 함정이었을 뿐이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이단으로 몰려 체포되어 70일 이상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1415년 7월 6일 그는 화형대 위에서 당국의 회유를 거부하고 끝까지 진리를 지키려는 순교자의 자세로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얀 후스 기념상과 틴 성당
얀 후스 기념상과 틴 성당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그의 추종자들은 크게 분개했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체코민족에 대한 탄압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1419년, 동요한 후스의 추종자들은 시청으로 달려가 시의회 의원들을 구시청사 창문에서 광장 바닥으로 내던지고, 가톨릭 성당과 수도원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이리하여 후스 전쟁이 발발하여 15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틴 성당은 바로 후스 추종자들의 구심점이 되던 성전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후스파의 패배로 끝났고, 나중에 체코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합스부르크 왕가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체코의 애국정치가 나프르스텍은 얀 후스 기념상 건립계획을 추진했고 체코 아르누보 양식의 유명한 조각가 샬로운이 조각을 맡았다. 얀 후스 기념상은 그의 순교 500주년을 기념하여 1915년 7월 6일에 제막되었다. 하지만 이 제막식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행사였을 뿐이다. 왜냐면 이 기념상 자체가 반 가톨릭적인 성격이 워낙 강했으므로 가톨릭을 국교로 하는 오스트리아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막식 대신에 프라하 시민들은 각자 한 송이의 꽃을 들고 와 이곳에 조용히 바쳤다. 그 이래로 이 기념상은 외세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자 더 나아가 체코 독립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글·사진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역사, 언어 분야에서 30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했으며 국내에서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동유럽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외에도 여러 권 있다. culturebo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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