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과 상드가 머물던 수도원 방에서 본 발데모사 풍경
쇼팽과 상드가 머물던 수도원 방에서 본 발데모사 풍경

[아츠앤컬쳐] 스페인 동쪽 지중해에 위치한 마요르카섬은 풍경도 아름답고 기후도 온화하여 중부 및 북부 유럽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1838년 11월 쇼팽과 그의 연인 조르쥬 상드(George Sand 1804~1876)도 파리를 떠나 이 섬을 찾아왔다. 그들은 수도 팔마 데 마요르카(Palma de Mallorca) 북쪽 약 20킬로미터 내륙 골짜기 마을 발데모사(Valldemossa)의 수도원에서 다음해 2월 13일까지 머물렀다. 쇼팽과 상드의 추억을 간직한 이이 수도원은 연중 내내 ‘쇼팽 순례자’들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수도원 안 쇼팽과 상드가 지내던 방에는 두 연인을 기념하는 동상과 초상화 등을 비롯하여, 피아노와 유품 등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유난히도 상드의 자필원고 <마요르카의 어느 겨울>의 사본에 눈길이 간다. 이것은 그녀가 마요르카에서 쇼팽과 함께 보낸 날을 회고하면서 1842년에 쓴 글이다.

쇼팽과 상드가 파리에서 처음 만난 것은 1836년 11월 5일. 상드는 쇼팽의 음악적 매력과 마력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당시 26세의 쇼팽은 이미 연주자와 작곡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1년 전에 결핵을 심하게 앓은 적이 있었다. 상드의 본명은 아망딘 오로르 뒤팽(Amandine Aurore Dupin)으로 쇼팽보다 6세 연상인 데다가 이혼 경력이 있으며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13살 아들 모리스와 9살의 딸 솔랑쥬가 있었다. 남장을 하고 시가를 피우며 자신의 남자 연인들에 대해 떠들어대는 그녀에게 쇼팽은 처음에 거부감을 보였으나 마침내 1838년 여름 그녀의 집요한 구애에 그만 굴복하고 말았다.

수도원 입구에 세워진 쇼팽의 두상
수도원 입구에 세워진 쇼팽의 두상

마침내 두 연인은 마요르카 여행을 결심했다. 상드가 그해 겨울을 마요르카에서 보내기로 작정한 이유는 쇼팽뿐 아니라 류머티즘을 앓고 있는 아들 모리스도 남국에서 건강을 회복하기를 기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한 작가로서 파리를 떠나 조용한 곳에서 창조적인 시간을 더 갖기를 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해 11월 7일 이들은 바르셀로나에서 연락선을 타고 다음날 팔마 데 마요르카에 도착했다. 지중해의 밝은 햇살과 온화한 날씨가 이들을 맞았다. 하지만 얼마 후 상황은 기대와는 완전히 달리 전개되었다. 힘겹게 겨우 집을 구했으나 문과 창문도 제대로 없고 주변이 시끄러운 데다가 비도 샜다. 이런 곳에서는 오히려 건강이 악화될 수 있기 때문에 팔마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교외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쇼팽에게 결핵 증상이 또 나타나는 바람에 12월 중순경 이들은 이곳에서 쫓겨나 발데모사의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수도원에 보존된 쇼팽이 쓰던 마요르카의 피아노
수도원에 보존된 쇼팽이 쓰던 마요르카의 피아노

그런데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어쩌다가 햇빛이 비치긴 했지만 비바람이 자주 휘몰아쳤다. 난방도 없는 수도원의 방 안에는 마요르카에서 제작된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 이 피아노로 쇼팽은 전주곡 작곡에 전념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어 갔으며 상드는 그가 심리적으로 위축될까 봐 노심초사했다. 설상가상으로 이곳 사람들은 남자 같은 모습의 상드에 매우 배타적이었고, 심지어 그녀에게 물건을 팔 때는 으레 바가지를 씌우기도 했다. 그뿐 아니다. 파리에 주문한 플레옐 피아노는 마요르카를 떠나기 3주 전에 겨우 도착했으나 세관에 묶였다가 발데모사를 떠나기 하루 전에야 볼 수 있었으니…

이처럼 쇼팽과 상드는 이곳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오히려 고생만 했을 뿐이다. 사실 이곳에서 겪은 혹독한 경험과 이곳 사람들에 대한 상드의 증오는 바로 <마요르카의 어느 겨울>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발데모사를 찾는 여행자들은 이런 사실들을 굳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들은 아름다운 꽃들로 단장된 목가적인 시골 도시에서 쇼팽과 상드의 사랑의 낭만적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쇼팽이 상드를 위해 작곡했다고 전해지는 ‘Prelude Op. 28, No. 15’, 일명 ‘빗방울 전주곡’의 선율에 빠져보기도 한다. 그리고 7월과 8월에는 이곳에서 쇼팽 음악제가 열리니 오로지 쇼팽의 낭만적인 음악을 따라 달콤하고 꿈같은 사랑의 이야기만을 상상할 뿐이다.

 

글·사진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역사, 언어 분야에서 30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했으며 국내에서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동유럽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외에도 여러 권 있다. culturebo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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