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크너
브루크너

[아츠앤컬쳐]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는 원래 음악가가 아니라 교사의 직업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가 작곡가로서 인생을 살고자 결정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으며 안정된 직업조차 내놓아야 했다. 브루크너는 17살 때에 교원 임용시험에 합격해 빈트하크에서 첫 번째 교사 생활을시작했으며 그 후에는 크론슈토르프에서 두 번째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음악 수업을 받고 합창단에서 지휘를 하는 등 음악과의 인연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1845년에는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 기숙학교의 교사로 채용되었고 수도원에서 오르가니스트로도 임명되었다. 이것이 브루크너가 처음 가지게 된 음악가로서의 공식 직함이었다.

브루크너의 음악인으로서의 삶은 오르가니스트로서 시작되었다. 가톨릭 신앙심이 깊었던 브루크너의 조부와 부친은 브루크너에게 교회음악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후에 교사 교육을 받아 교사가 되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커져만 간 청년 시절이었다.

그 후에는 유명 교육자 지몬 제히터에게 음악이론을 배워 음악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튼튼히 하였고 화성학과 대위법을 학구적으로 연구하여 작곡가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브루크너가 작품 번호를 붙이지 않았던 ‘교향곡 f단조’는 브루크너가 린츠의 지휘자인 오토 키츨러에게 작곡을 배우고 있을 무렵에 만든 습작이다. 그 이후에 작곡된 d단조의 교향곡도 습작으로 ‘교향곡 0번’이라는 특이한 번호가 붙어있다. ‘교향곡 0번’이라는 특이한 번호는 그가 완성도 높은 예술을 계속해서 추구해갔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이가 40대에 이르러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이 세상에 등장했다.

베토벤의 첫 번째 교향곡이 나이 30세에 발표된 것과 비교하면 베토벤보다 무려 10년 이상이 늦은 나이에 발표된 것이다. 브루크너가 교사의 직업을 포기하고 작곡가로 입신할 뜻을 굳힌 것은 키츨러에게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브루크너는 어느 날 예술적으로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바그너, 당대 독일의 최고 오페라 작곡가였다. 브루크너가 처음으로 접한 바그너의 작품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였다. 키츨러가 지휘한 ‘탄호이저’ 연주는 브루크너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었다.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대가 중의 대가’라 칭하면서 열렬한 바그너 예찬자가 되었다.

브루크너의 행보는 당시 빈의 음악평론계에 의해 방해를 받기도 하였다. 당시 빈의 음악계는 브람스를 옹호하는 한슬리크파와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바그너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공공연히 바그너를 지지했던 브루크너는 한슬리크를 비롯한 브람스 진영의 극렬한 비난을 받았다. 브루크너가 바그너와 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브루크너는 바그너의 예찬자라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세월이 흘러 브루크너는 작곡의 대가로서의 위상을 인정받게 된다.

특히 그의 교향곡 제7번이 1884년과 1885년에 라이프치히와 뮌헨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된 후에는 상당한 명예를 얻게 된다. 교향곡 제7번의 아다지오 악장은 바그너가 창시한 바그너 튜바가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쓰인 음악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1886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황실로부터 연금도 받게 되었다. 빈 음악동우회는 1891년에 브루크너를 명예회원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19세기 후반에 활약한 최고의 교향곡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히고 존경을 받기까지 그는 꾸준히 자신의 예술을 추구하고 가다듬은 작곡가였다. 애초에는 부모의 뜻에 따라 교사로서 살았으며 그 후에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서, 결국은 자신의 명작을 세계에 남긴 역사적인 작곡가가 되었다.

글 | 이석렬
2015 예술의전당 예술대상 심사위원, 2015 이데일리 문화대상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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