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말러가 1911년 5월 18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후 1백여 년이 지났지만, 그의 영향력은 해가 갈수록 더 커지고 있다. 말러의 호숫가 오두막 작곡실은 전 세계 말러 추종자들, 소위 말러리안(Mahlerian)들의 성지(聖地)가 된 지 오래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인근 슈타인바흐 마을 알터제 호반의 4평이 채 안 되는 이 건물은 정말 ‘작은 기적‘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말러 파워의 가장 핵심부에 교향곡 2번이자리 잡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말러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고, 필자에게는 말러 최고의 걸작인 교향곡 2번 일명 ‘부활(Die Auferstehung)’이 바로 이 오두막에서 작곡되었다고 한다. 그의 친필 원고 교향곡 2번 ‘부활’의 악보는 2016년 11월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당시까지 역대 최고가인 450만 파운드(약 65억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232페이지 분량의 말러 수기 악보에는 파란색 크레용으로 수정하거나 주석을 달아 놓은 그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세계인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부활‘이 만들어진 장소가 바로 이토록 작은 호숫가 오두막이라니. 일 중독자였던 말러는 시즌 내내 지휘자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여름이면 이곳 오두막을 찾아 교향곡 작곡에 집중했다. 그럴 때에는 자기 시중을 드는 여동생 외에 누구도 이 오두막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인 누구나 말러의 오두막을 열고 들어가 피아노 앞에 앉아 말러가 바라보던 호수를 그대로 바라보며 말러가 교향곡 2번 부활 악보를 채워가던 순간들을 회상해 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구글 지도에 ‘Seefeld 14, 4853 Steinbach am Attersee’라는 주소만 적어 넣고 다양한 호숫가 정경을 감상하며 차로 한 시간 정도 여유 있게 달리면 말러가 묵었던 숙소 Föttinger 호텔에 도달한다. 이 호텔 프런트에서 말러 작곡실을 보고 싶다고 하면 미소와 함께 커다란 금속 높은음자리표에 매달린 열쇠를 건네며 장소를 가르쳐 준다. 지시 받은 대로 3분만 걸으면 호숫가 절경을 배경으로 말러 오두막 작곡실이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 그림처럼 등장한다. 건물 입구에는 ‘Gustav Mahler Komponierhäuschen’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틀림없는 그 집이다. 호텔에서 받은 열쇠를 돌리면 문이 열린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라면 이 순간에 문을 열고 선뜻 방으로 들어설 수가 없을 것이다.
안도 다다오는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를 마음속 깊이 존경하고 있다고 밝혔었다. 그는 르 코르뷔지에 때문에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생활이 어려워 대학교 건축과에서 건축을 정식으로 배우지 못했던 안도 다다오는 아르바이트를 계속해가며 돈을 모아 일본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에 도달한 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오랜 시간에 걸쳐 꿈에 그리던 프랑스 스위스 접경의 롱샹 성당에 도착한다.
르 코르뷔지에 최고 걸작 중 하나인 롱샹 성당에 도착한 안도 다다오는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성당 스테인드글라스의 찬란한 빛에 눈이 부셔 문을 다시 닫을 수밖에 없었다. 안도 다다오는 다음날 다시 엄숙히 롱샹 성당을 찾았다. 청년 안도 다다오가 르 코르뷔제의 건축물에 그렇게 감동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세계적 건축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어디가 말러의 오두막 작곡실이며 르 코르뷔제의 롱샹 성당과 같은 곳일까.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 시절을 보내며 글을 썼던 전남 강진 다산초당이 바로 그런 곳이 아닐까. 윤이상 작곡가의 경우는 대부분 독일에서 주된 작곡 생활을 해와 그의 고향 통영에서는 그러한 곳을 찾기 힘들 것 같다. 김광석의 경우 대구 김광석거리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
말러의 호숫가 오두막 작곡실은 우리나라 건축법 기준으로는 불법 건축물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라면 잘츠부르크 인근 아름다운 호숫가에 4평도 안 될 듯한 작은 건축물이 준공검사가 날 수 있을까. 화장실도 없고, 전기도 없고, 오폐수 정화시설도 없고 그냥 바로 호숫가에 멋대로 지어진 집이라니. 그런데 오스트리아에서는 말러 사후 말러협회에서 이 오두막을 개보수해 현재까지 말러 성지(聖地)로 관리 보전해오고 있다.
문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기 힘들다. 우리 주변에 문화의 아이콘들이 적다는 것을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들 스스로가 의미 있고 중요한 문화의 아이콘들을 잊어버리고 파괴해 가고 있는 것을 더 안타까워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문화의 흔적, 문화인들의 미세한 체취라도 찾아 엄중하게 보호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이 시대를살아가며 다음 세대에 문화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할 우리들의 책임이다.
글 | 강일모
前 국제예술대학교 총장
경영학박사/ 음악학석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