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그림이 되다

엑상프로방스
엑상프로방스

 

[아츠앤컬쳐] 폴 세잔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새 지평을 연, 현대미술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화가로 평가받는다. 심지어 “인류에게는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세 개의 사과가 있는데, 인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 한 사과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 다른 하나는 뉴턴의 사과, 그리고 서양미술사의 거장 세잔의 사과”란 말이 있을 정도다. 요새는 스티브 잡스의 사과가 먼저 떠오르긴 하지만. 세잔은 미술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할 무렵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라는 다짐을 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사과 한 알을 가지고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세잔이 사과를 그리고 있을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외관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잔의 사과에는 빛의 변화와 같은 순간적인 것은 없다. 작품 속에서 특별하지도, 아무런 상징도 없는, 심지어 먹음직스럽지도 않은 그의 사과는 그저 덩그러니 사과 본연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 단단하고 썩지도 않아 보이는 사과는 마치 세잔의 고집과 집념을 그대로 닮은 것 같이 느껴진다.

​세잔의 아뜰리에​
​세잔의 아뜰리에​

실제 모델로 쓰인 사과는 세잔이 정확한 묘사를 위해 시간이 오래 걸린 나머지 썩기가 일수였다고 한다. 세잔은 사과의 모든 것을 하나의 그림에 담기 위해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다각적인 시각을 연마했다. 그리고 그는 의도대로 사과의 시간에 따른 변화, 위에서 본 것과 아래서 본 것, 옆에서 본 것과 앞에서 본 것, 한 마디로 사과의 모든 것을 하나의 사과에 모두 담아낸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 여행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이번에는 엑상프로방스를 소개하고 싶다. 엑상프로방스는 부드러운 삶의 여유가 넘치는 프로방스의 대표 도시로 꼽히는 곳으로 역사, 건축, 유적들이 도시 곳곳에 자리 잡고 분수, 정원, 미술관, 박물관과 같은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올리브나무, 삼나무, 포도나무 등이 심어져 있는 프로방스의 전형적인 풍경과 함께 유서 깊은 도시의 모습은 정말 ‘멋지다’라는 단어 외에는 특별히 떠오르는 단어도 없다. 특히 이곳은 세잔을 사랑하는 미술애호가들에게 특별한 여행이 가능한 곳이다. 세잔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생투빅투아르산
생투빅투아르산

세잔은 1839년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나 모자공장으로 큰돈을 벌고 은행을 설립했던 아버지 덕분에 이곳에서 유복한 유년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그림을 배우기 위해 꽤 오랫동안 파리에서 생활하기도 하지만 미술계의 엄청난 벽에 좌절하며 다시금 그림이 가지는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고향에 돌아와 작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결국 그를 근대회화의 아버지라 불리게 만들어 준 작품들을 이 엑상프로방스에서 만들어낸다.

엑상프로방스에는 세잔의 흔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특히 도시의 중심인 미라보거리 곳곳의 바닥에는 세잔을 상징하는 표식을 붙어 있고 그 표식만 잘 따라다니다 보면 그가 태어난 집, 그가 살았던 집, 그가 자주 들르던 카페 등 그의 그림과 삶의 무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그의 아뜰리에는 꼭 추천하는 방문지이다. 이곳은 폴 세잔이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인생의 마지막 4년을 보낸 곳으로 세잔이 직접 설계하고 직접 지은 곳이다. 엑상프로방스 북쪽 언덕 비탈에 이는 농가 주택이었던 이곳에서 세잔은 정말 치열하게 작품 생활을 이어갔다.

세잔의 아뜰리에
세잔의 아뜰리에

꽃과 나무가 가득한 정원은 작고 조용하지만 그의 손길이 담겨서 그런지 몰라도 감각적이다. 아뜰리에 내부에는 세잔의 손때가 탄 화구들과 그의 정물화의 모델이 되었던 오브제들로 가득하다. 그의 정물화 속에서 보던 물건들이다 보니 반가움이 든다. 화가가 살던 방답게 북쪽 전체를 차지하는 창문은 마치 벽면처럼 거대하다.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어 차분하고 냉철하게 작업을 하고 빛의 굴절이나 투사 방향이 아침저녁으로 달라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화가의 작업실은 반드시 북쪽 창문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뜰리에는 아담하지만 그의 예술적 성취의 모든 과정이 담겨서일까 괜스레 조심스럽고 고요한 마음이 들게 한다.

생투빅투아르 세잔
생투빅투아르 세잔

아뜰리에에서 나와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화가들의 테라스가 나온다. 화가들의 테라스는 폴 세잔이 그의 대표작 생트빅투아르 산을 그리던 장소로 그에게 영감을 받은 많은 화가들이 찾아들게 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폴 세잔은 매일 같이 이 언덕길을 오르며 생트빅투아르 산을 묵묵히 담아낸다.

멀리서 보이는 생트빅투아르 산은 매우 아름답다. 앙증맞고 소박한 프로방스의 주택들 사이로 한적한 언덕길에 오르다 보면 어느새 엑상프로방스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천천히 언덕 위 테라스에 올라서는 순간 세잔이 보았던 그 풍경이 내 눈에도 가득 차기 시작한다. 눈 앞에 펼쳐지는 생투빅투아르 산은 웅장하지만 전체적으로 조용한 그의 작품 같다.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가만히 산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어느샌가 여행은 그림이 된다.

글·사진 | 강정모
유럽가이드이자 통역안내사로 일하며 세계 유명 여행사이트인 Viator 세계 10대 가이드로 선정된 바 있다. 롯데백화점 문화센터와 여러 기업에 출강하며, 아트 전문여행사 Vision tour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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