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다03, 캔버스에 아크릴, 23cm x 27cm, 2016
흔들리다03, 캔버스에 아크릴, 23cm x 27cm, 2016

 

[아츠앤컬쳐] 이탈리아 베네치아 서쪽으로 레시니 산맥 기슭에 자리하고 아디제 강이 반원을 그리며 흐르는 베로나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 시대의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도시다. 그중 야외 오페라 극장으로 이용되는 원형투기장 아레나 디 베로나가 대표적이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담긴 줄리엣의 집도 여행자들에게 유명한 유적지다.

카펠로 거리 27번지 까사 디 줄리에타, 바로 줄리엣의 집이다. 입구부터 시작해 모든 벽에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여행자들과 가슴에 담아 둔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남긴 사랑의 낙서로 가득했다. 이제는 더 이상 쓸 공간도 없는 그곳에서 아주 작은 틈을 찾은 한 여자는 까치발을 하고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적고 하트를 그린 후 오늘의 날짜와 시간을 적는다. 바닥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한 남자는 옷과 손이 더럽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벽 아래쪽 빈 공간에 연인의 이름과 함께 짧은 글을 쓰고 있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이곳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과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찾아온 이들의 마음은 그냥 열성적인 여행자들이라고만 하기엔 부족했다. 얼마나 간절하기에 이 작은 글 한 줄을 남기러 이곳까지 찾아왔을까. 나도 가방을 열어 펜을 꺼내 빈틈을 찾다가 벽면 중앙 다른 이들의 메시지 위에 겹쳐 짧게 내 글을 써넣고 작은 그림을 그렸다. 누군가 지우지만 않는다면 먼 훗날에도 그 복잡한 낙서 틈에서 내가 남긴 이름, 그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줄리엣의 집 마당에 들어서면 줄리엣 동상이 마당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줄리엣의 오른쪽 가슴을 만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에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저마다 줄리엣의 오른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동상 왼쪽에 13세기에 지어진 건물 2층에 로미오가 올라갔던 줄리엣의 방 발코니가 재현되어 있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이전에 <로미오와 줄리엣>과 유사한 이야기가 베로나에 존재했다고 한다. 14세기경 베로나에는 원수처럼 지내는 두 귀족 집안이 있었다. 두 가문은 각각 교황파와 황제파로 대립하고 싸웠는데 이것이 소설의 모티프가 되었다고 한다. 역사 속 두 귀족 가문의 남녀는 분명 이런 고풍스런 집에 살면서 서로를 그리워하고 아파했을 것이다. 그 실화에 기초해 오랜 세월 동안 비슷한 테마의 이야기와 시가 전해졌고 셰익스피어는 그 이야기에 다양한 캐릭터와 극적인 요소를 가미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연인을 만들어냈다.

줄리엣의 집을 나와 아디제 강변을 따라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찾아가면 그곳 지하에 줄리엣의 묘가 있다. 관은 뚜껑이 없이 공개되어 있는데 예상대로 비어 있었다. 하지만 여행자들은 기꺼이 관을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고, 꽃을 던져 추모하기도 했다. 실존하지 않은 허구의 인물임을 알기에 존재를 긍정하거나 부정할 필요도 없다. 세상 모든 이의 마음속에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의 인물로, 우리가 평생 바라는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사랑이 있음을 증명해 주는 연인으로 그 찬사와 추모, 꽃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

글 | 배종훈
서양화가 겸 명상카툰과 일러스트 작가. 불교신문을 비롯한 많은 불교 매체에 선(禪)을 표현한 작품을 연재하고 있으며, 여행을 다니며 여행에서 만난 풍경과 이야기를 소소하게 풀어 놓는 작업을 하고 있다. 또, 현직 중학교 국어교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bjh4372@hanmail.net / www.facebook.com/jh.bae.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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