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을 걷다가, 캔버스에 아크릴, 14cmx18cm, 2011
골목길을 걷다가, 캔버스에 아크릴, 14cmx18cm, 2011

[아츠앤컬쳐] 아를은 론 강이 마르세유 북서쪽에서 삼각주를 이루며 갈라지는 카마르그 평야에 있다. 12세기에는 이탈리아 공화국들과 매우 비슷하게 무역과 항해에서 막강한 독립국으로 떠올랐고 1239년 프로방스에 흡수되었다. 구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일부는 로마 시대에 쌓은 것으로 BC 1세기에 건립되었으며 2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는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은 아직도 투우 경기와 연극공연에 쓰이고 있다. 특히 빈센트 반 고흐가 가장 좋은 작품을 그리던 시기에 거주하던 곳으로 고흐의 흔적을 찾으러 오는 관광객이 많다.

수도원 바로 앞이 리퍼블릭광장이었다. 원래는 로마의 온천으로 개발되었던 곳을 광장으로 만든 것이라는데 특이하게도 광장의 중앙에 높은 오벨리스크가 하늘로 솟아 있었다. 이 오벨리스크는 17세기의 태양왕 루이14세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인근 로마 유적지에서 이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분주한 여행의 시기가 아니기도 하고 평일 낮이라 한적한 광장에는 노인들이 몇 명 있는 정도였다.

광장에서 서쪽으로 골목을 조금만 걸으면 고흐가 발작을 일으켜 입원한 정신병원인 에스파스 반 고흐가 나온다. 안으로 들어가면 예전 모습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마당에는 고흐가 그린 병원의 모습이 인쇄되어 있는데 그림과 실제 풍경을 비교해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실제 그림 속 풍경과 같은 위치는 2층으로 올라가서 봐야 한다. 볕이 잘 드는 기둥에 기대 그림을 그리는 여행자의 모습에서 고흐가 병원 정원에서 스케치를 하고 붓을 들었을 모습을 떠올렸다.

이 정신병원을 이야기하면서 고갱을 빼놓을 수 없다. 1888년 고갱은 아를을 찾아 반 고흐를 들뜨게 했지만 10주도 채 안 되는 그들의 동거는 심한 다툼과 자신의 귀를 자르는 고흐의 유명한 일화만을 남기고 막을 내린다.

여름엔 40의 날씨가 계속되기에 고스란히 햇볕을 견디며 걸어다니기 힘들지만 고흐의 그림처럼 소용돌이치는 자연과 들판을 가득 메운 해바라기, 햇빛을 담은 화려한 색채를 즐기기엔 제 격이다. 또 고흐의 표현대로 ‘창백한 유황빛으로 반짝인다.’는 아를의 태양과 별이 쏟아지는 밤의 론강은 고흐의 자취를 따라 온 여행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프로방스의 바람인 미스트랄로 인해 고흐의 그림 속 자연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그려졌다고도 하는데 실제 바람이 부는 계절의 풍경은 일면 설득력을 갖게도 한다. 또 어떤 이는 그가 환각 상태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하지만 반 고흐의 그림 속 실제 풍경을 아를에서 직접 대면한 사람이라면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만은 고흐의 정신은 누구보다 맑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론강을 둘러보고 다시 고흐의 밤의 카페로 갔다. 낡고 빛바랜 붉은색이 많이 쓰인 카페 내부는 쓸쓸했다. 점원으로 보이는 두 여자는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커피 한 잔을 시켜두고 이층과 카페 여기저기를 둘러봤지만 고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고흐가 수시로 찾아왔을 때도 그저 평범한 동네 카페이고 술집이었을 그곳에 아무런 특별한 점이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억지스럽게 붙여 놓은 조잡한 고흐의 그림 포스터가 여기저기 벽에 붙어 있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과거 유명한 누군가나 영화 등의 행적을 따라 찾은 여행은 실망이 더 큰 경우가 많다. 책에서 읽으며 느낀 감동과 상상, 스크린의 멋진 영상의 순간을 기대하고 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부분 조작된 상상이고 영상이라는 것을 현장에서 직면하고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자신의 상상 안에 아름답게 저장된 영상을 다시 실제 위에 얹어 더 아름답게 구성하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를은 언제고 다시 오고 싶은 도시다. 고흐와 관련 없이도 말이다.

글 | 배종훈
서양화가 겸 명상카툰과 일러스트 작가. 불교신문을 비롯한 많은 불교 매체에 선(禪)을 표현한 작품을 연재하고 있으며, 여행을 다니며 여행에서 만난 풍경과 이야기를 소소하게 풀어 놓는 작업을 하고 있다. 또, 현직 중학교 국어교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bjh4372@hanmail.net / www.facebook.com/jh.bae.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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