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길어지는 시간, 캔버스에 아크릴, 41cm x 32cm. 6호, 2016
그림자가 길어지는 시간, 캔버스에 아크릴, 41cm x 32cm. 6호, 2016

 

[아츠앤컬쳐] 생장피드포르는 프랑스 외곽의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이곳은 또한 세계적인 마을이다. 과거 9세기 무렵 예수의 제자인 ‘야고보’가 프랑스에서 스페인에 예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걸었던 순례의 길이 시작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 후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곳은 세계의 많은 순례자들이 자신만의 이유를 가지고 걷고 있다. 근래 웰빙 바람으로 걷는 문화가 세계적 트렌드가 되었지만 이곳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걷고, 생각하고, 찾고, 비우는 자리이다.

7월 24일 오전 6시. 1,100km를 밤새 달려 스페인과 피레네산맥을 경계로 붙어있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생장피드포르(St. Jean Pied de Port)에 도착했다. 렌터카 문제로 파리의 샤를 드골공항에서 예정에 없는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힘들게 벤츠 왜건(c200)을 찾아 짐과 사람이 뒤섞여 쉬지 못하고 달려왔다. 모두가 지친 상태였지만 이곳의 서늘하고 기분 좋은 새벽 공기는 차에서 내리는 순간 모든 피로와 짜증을 가져갔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유럽을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나서야 실감할 수 있다니! 공항과 차에서 지친 표정과 한숨으로 보낸 시간이 아깝고 한심했다.

쉼 없이 달려온 36년을 돌아보고, 비움 없이 채우려고만 해서 용량이 다한 좁은 마음을 정리하겠노라 해놓고선 금세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조급해졌으니 말이다. 그동안의 내 마음은 정리를 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뤄둔 다락방이었다. 버리기엔 아까워 언젠가 다시 쓰겠지 하고 쌓아두었다가 10년이 넘게 먼지를 덮고 앉아있는 곳. 이젠 그 다락도 한계 지점에 있었다. 작은 충격으로도 아무렇게나 쌓아둔 마음들이 당장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바로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안에 서서 나 자신에게 다시 말한다. 나는 지금 이곳에 있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길 위에 다시 꺼내보지 않을 마음들을 버리고 가겠노라고.

어딘가에서 일찍 걸음을 시작한 순례자들의 활기찬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차를 몰아 피레네 산을 넘었다. 산을 오르는 동안 도로 옆에는 이곳이 순례길임을 의미하는 노란색 조가비가 그려진 표지판이 보인다. 노란 조가비와 화살표만 따라가면 900km에 달하는 순례길을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국경을 넘어 스페인에서 첫걸음을 시작하기로 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산 하나를 두고 스페인과 프랑스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건물들도 그렇고 사람들의 표정도 그랬다.

글 | 배종훈
서양화가 겸 명상카툰과 일러스트 작가. 불교신문을 비롯한 많은 불교 매체에 선(禪)을 표현한 작품을 연재하고 있으며, 여행을 다니며 여행에서 만난 풍경과 이야기를 소소하게 풀어 놓는 작업을 하고 있다. 또, 현직 중학교 국어교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bjh4372@hanmail.net / www.facebook.com/jh.bae.963

저작권자 © Arts & Cultur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