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라만차 지방은 해발 610m로, 톨레도 산맥과 쿠엥카 구릉지대의 서쪽 돌출부 사이에 있다. 아랍인들에게는 메마른 땅 또는 황무지라는 뜻의 알만샤로 알려졌던 곳으로, 중세시대에 그리스도교 군대와 무어인 군대가 대치했던 지역이다. 16세기까지 서쪽 지역은 라만차데몬테아라곤 혹은 라만차데아라곤이라고 했고 동쪽지역은 라만차라고 불렸다. 라만차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사베드라)가 17세기에 소설 〈돈 키호테 Don Quixote〉에서 묘사한 것과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알카사르데산후안 부근에 있는 엘토보소와 아르가마시야데알바와 같은 많은 마을들이 돈 키호테가 벌인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다. 밀·보리·귀리·포도 등을 재배하는 농업이 주된 경제활동이지만 열악한 환경 때문에 많은 제한을 받는다. 북부에 사냥과 낚시에 적합한 휴양지들이 있어서 관광객들의 수가 늘고 있다.
해가 짧은 겨울이라 여유가 없었다. 돈키호테에 등장한 풍차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 해가 지는 풍경을 보고 내려오는 것은 꽤 시간이 걸릴 일이었다. 마을의 작은 박물관과 기념품점 등을 서둘러 둘러보느라 제대로 보는 것 없이 조급한 마음으로 움직이다가 화장실에 들렀다. 그리고 휴게실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뽑아 서둘러 마시려다가 멈칫했다. 휴게실 모퉁이에 놓인 무심한 나무벤치가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순간 목표만을 생각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늘 무언가 조급해하는 내 모습이 쑥스럽고 부끄러웠다. 정해진 일정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여행자이기에, 어쩌면 여유가 없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은 빠듯한 생활을 멈추고 여유를 찾고자 온 것이 아닌가.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를 다시 생각해야지. 여행에서조차 일정에 쫓겨 종종대지는 말아야지.
나는 부러 한 걸음이라도 느리게 걷고, 커피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골목을 두어 번 지나고 마을을 벗어나니 멀리 언덕 위로 줄지어 선 풍차가 보였다. 언덕으로 올라가 길게 펼쳐진 풍차를 바라보고 있으니 돈키호테와 산초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바람이 강해서 몸이 계속 휘청거렸다. 가까운 풍차에 기대서 해가 지는 언덕과 바람이 불어 내려가는 지평선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한 장 남겼다. 비스듬한 햇빛으로 렌즈 플레어가 생겼다. 하지만 마음에 든다. 언제든 이 사진을 보면 뷰파인더 가득 빛이 들어오던 눈부신 라만차의 이 언덕을 기억할 테니까.
풍차 내부 바람이 불지 않는 그곳에 비둘기들이 모여 있었다. 꾸르륵꾸르륵 이야기 중인 그들 곁을 지나 밖이 내다보이는 작은 창이 있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돌벽에 기대 햇살을 받으니 나른해져 스르르 눈이 감긴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바람 부는 소리에 정신이 든다. 어두워진 언덕에서 바라보는 이국의 야경이 서울의 내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처럼 정답다.
글 | 배종훈
서양화가 겸 명상카툰과 일러스트 작가, 현직 중학교 국어교사
bjh4372@hanmail.net / www.facebook.com/jh.bae.96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