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가브리엘레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 1863~1938). 이탈리아 출생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저널리스트로 활약하면서 20세기 초반 이탈리아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그리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탈리아 문학사상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만큼 화려한 예술가적 ‘광기’로 이탈리아 민족을 사로잡은 문인이 과연 또 존재할까? 그의 인생 여정은 그야말로 한편의 가슴 뛰는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이 흥미진진하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1863년 3월 12일 아브룻쪼(Abruzzo) 주의 페스카라(Pescara)에서 이곳의 대지주이자 군수였던 프란체스코 라파넷따(Francesco Rapagnetta)의 아들로 출생한다. 1879년, 당시 16세의 나이로 프라토(Prato)의 기술학교를 다니던 중 첫 번째 시집인 ‘이른 봄에(Primo Vere)’를 발표하고, 1881년 고등학교 졸업 후 로마 사피엔짜 대학교(University of Rome La Sapienza)에 입학해 로마로 거처를 옮기고 다양한 문학단체들과 귀족들의 살롱에 참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잠재적인 카리스마와 작가로서의 재능은 그에게 매료된 많은 귀족 여성들에 의해 빛을 발하게 되는데, 키도 작고 대머리인 외모상으로는 볼품없는 그가 어떻게 많은 재력가의 귀부인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다수의 귀부인들은 그의 매력적인 독특한 목소리에 빠져들었다고 하는데, 그와 사랑에 빠졌던 인물 중 한 명인 프랑스 여배우 시몬은, “여성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그의 힘은 탁월한 언변과 음악소리와 같은 목소리였다. 여성은 말에 약하고, 말에 매혹되며, 말의 지배를 받고 싶어한다”고 고백했다.
리듬을 섞어 또박또박 발음하는 교회 종소리와도 같은 매혹적인 목소리로 문인 특유의 화려한 관용구, 시적 이미지를 내포한 문구, 여인의 마음을 녹여 버릴 것 같은 찬사 등을 연발하며 동시에 성적인 뉘앙스와 로망이 짙게 배어있는 어법을 구사하면서 여인들의 마음에 최면을 걸어 놓는다. 그러다 결국에는 갈레세 공작의 딸과 결혼에 성공함으로써 귀족 사교계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단눈치오가 특별한 재산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집필과 출간을 왕성하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를 사랑하는 상류사회의 수많은 여성들의 후원 덕분이다. 이는 1891년 마리아 갈레세와의 이혼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오히려 이혼 이후 그의 활동은 더욱 왕성했고 염문 또한 계속되었다. 그중에서 당시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배우로 손꼽히는 엘레오노라 두세(Eleonora Duse)와의 5년간의 동거, 그녀는 자신이 평생 동안 저축한 돈을 모두 그의 작품제작 활동에 투자하였는데 이는 그가 존경받는 문학가이자 희곡작가로써 명성을 얻는데 크게 기여한다.
그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두 가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의 참전과 16개월간의 피우메(Fiume) 지역 통치 사건. 이 두 사건은 그 안에 들끓고 있는 강경한 민족주의의 발현이며 특히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을 이탈리아 땅에 다시금 굳게 세워야 한다는 사명의식과도 같은 그의 의지가 행동으로 표출된 사건이었다.
단눈치오는 분명 유럽 데카당스 문학을 대표하는 천재적인 문인이다. 하지만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오히려 이 황당한(?) 두 사건 때문이며, 한 문학 비평가는 이를 두고 “세계문학사에서 유일무이한 사건, 일류 시인이요 해설자가 한 도시국가를 정복하고 통치했다”고 요약한 바 있다.
그럼 여기서 단눈치오의 성향을 잘 나타내는 두 사건의 대략적인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단눈치오는 1910년 당시 채권자들을 피해 프랑스로 건너가 희곡 등을 저술하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던 중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접한다. 그는 즉시 이탈리아로 복귀해 그의 탁월한 언변 능력을 발휘하며 이탈리아의 참전을 강력히 주장한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1차 세계대전을 이탈리아가 과거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주창하면서 이탈리아 내의 민족주의 세력을 규합해 마침내 1915년 5월 23일 연합국 측으로써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제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내린다. 물론 전쟁 승리 후 아드리아 해 쪽의 광대한 오스트리아 영토를 할양받기로 약속(일명 런던 조약)받으면서…
여기서 크게 감명을 주는 것은 단눈치오의 전쟁 참여가 단순한 지식인의 여론주도가 아닌 52세의 나이에 그것도 한 번의 군 경험조차 없었던 그가 자원입대하여 직접 전선에 뛰어든 상황이다. 또한, 단지 전선 참여 수준이 아닌 육군, 해군, 공군 전 분야에 걸쳐 가장 커다란 업적을 남긴 인물로서 개인이 받을 수 있는 최다수의 훈장을 받으며 전장에서 엄청난 성과를 보였다.
특히 그가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것은 공군 조종사로서인데 그 활약의 정점인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비행’은 오스트리아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단눈치오가 자신의 비행대 중 9대를 동원, 700마일 거리에 있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의 비행을 성공시키면서 선전 인쇄물을 배포한 사건이다. 이는 대국 오스트리아를 이탈리아의 한 문인이 완벽하게 농락한 사건으로 이탈리아 민족이 그에게 열광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결국, 연합국의 승리로 1차 세계대전은 종전되고 시인 단눈치오에게도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으나, 당시 미국 대통령인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한때 베네치아 공화국 소속의 오스트리아 일부 영토를 할양(런던 조약)받지 못하자 단눈치오를 비롯한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의 거센 반발이 시작되었다. 단눈치오는 이 ‘불편한 평화’를 바로 잡기 위해 당시 동지인 무솔리니에게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과거 카이사르의 말을 남긴 후 몸소 2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피우메 지역으로 돌진한다. 이 과정에서 극우파 출신의 퇴역 군인들, 탈영한 이탈리아 현역 사병들이 합류해 피우메 도시 관문에 이르렀을 때는 탱크와 장갑차, 트럭에 탄 군병력이 2,500명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도 연합군 이탈리아 사령관 피타루를 파견하지만 그 병력마저 사령관의 명령을 어기고 단눈치오에 합류해 결국에는 피타루가 단눈치오에게 총을 겨누게 된다. 이때 단눈치오는 피타루에게 외투를 젖히며 훈장이 가득 달린 자신의 옷을 보여주며, “만일 나를 죽여야 한다면 이곳을 쏘아 주시오.”라고 말해 피타루를 통열케 하고 자신의 뜻에 합류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기세를 모아 점령한 피우메에서의 그의 통치 정책은 실로 혁신적이고 이상적인 것이었다. 1920년 9월 8일 그가 선포한 카르나로 헌법은 평등주의 헌법으로 노동조합 중심의 법인형 국가를 표방하고 있었다. 피우메의 모든 국민은 각종 직업에 해당하는 법인에 소속되어 있어야 하며 이 법인들의 대표들로 양원제 의회를 구성하고 보통 선거제를 통해 선출한다. 또한, 종교, 언론 및 사생활의 절대적 자유를 보장하며 무엇보다 여성의 완전한 평등을 규정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최저임금제와 의료보험, 질병 및 부상, 실업, 노후에 대비한 사회보장제도까지 제정하고 있었다. 동시에 고대 로마에서처럼 비상시에는 단기간 독재관을 두고 안찰관 제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합국은 이러한 그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피우메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기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완성된 ‘시인’ 단눈치오 정부는 후에 새로 들어선 강경한 이탈리아 졸리티 내각에 의해 무너질 때까지 16개월 동안 노랑, 파랑, 포도주색으로 구성된 국기와 고유 통화까지 보유하는 완벽한 국가였었다! 그야말로 조국을 사랑하는 한 로맨티시스트 시인이 역사적으로 이루어 낸 유일무이한 도시국가 피우메였던 것이다!
이탈리아 북부 가르다 호수를 배경으로 가르도네 리비에라(Gardone Riviera) 마을에 그가 마지막 여생을 보낸 저택이 있다. 이름 하여 Vittoriale degli Italiani. 보통은 빅토리알레로 짧게 불린다. 아름다운 가르다 호수가 펼쳐지는 드넓은 언덕 위에 그는 그의 잊을 수 없는 전쟁 추억의 잔재들과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박물관 같은 저택을 완성하며 동시에 본업인 글을 쓰면서 남은 여생을 보냈다.
단눈치오라는 인물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마지막까지 살다간 이 빅토리알레 저택 방문은 필수일 것이다. 그의 천재적인 광기가 고스란히 드러난 걸작으로 그의 정신세계를 진하게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주제의 독특한 인테리어의 방들과 드넓은 공원에 지어진 원형극장, 성전 같은 그의 무덤, 그의 전쟁 전리품 박물관 등등… 특히 가르다 호수가 눈앞에 펼쳐지는 정원 언덕 벼랑 끝에 문자 그대로 지레로 ‘끌어 올려 박아 놓은’ 전함의 앞머리를 보는 순간은 그의 전쟁 추억에 대한 ‘광기’에 벌어진 입이 한동안 다물어지지 않는다. 개인 저택에 전장에서 쓰인 비행기와 군함이라니…
그는 그의 사후에 이 빅토리알레 저택을 이탈리아 전 국민이 방문하여 그를 기리며 그와 같은 뜨거운 심장으로 이탈리아 민족의 승리를 함께 누렸으면 하는 바람이었을까? 그렇다면 그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빅토리알레 저택으로의 발길은 그가 죽은 1938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끊긴 적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그를 생각하며 감동을 받는 곳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보연
아츠앤컬쳐 밀라노특파원, 日本女子大學 卒業, 문화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