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세계 여러 나라는 각기 고유한 의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여름에 삼베나 모시를 소재로 한 옷을 입는 것과 같이 인도네시아에는 바띡이라는 옷감이 있다. 이를 어의적으로 해석하면 ‘날염’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바띡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그 이상이다. 2009년에 유네스코에서 세계무형문화재로 지정한 바띡은 광목에 바띡 문양을 수공으로 그려 넣은 천을 말하며 그 문양, 기법을 다 포함한다. 지금은 견직물을 사용하기도 하며 대량생산을 위하여 찍어내기도 한다.
인도네시아의 바띡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1960년대에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에밀리오 푸치(Emilio Pucci)가 바띡 문양에서 영감을 얻은 적이 있었으며 그 후 아르마니(Giorgio Armani), 겐조(Kenzo), 폴 스미스(Paul Smith)와 같은 디자이너들이 바띡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바띡 작업은 광목에 바띡 문양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대개 여성이 작업을 담당하는데 바띡의 문양이 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며 동식물, 기하학적 도형 등이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바띡 문양의 소재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바띡 문양을 그린 후에는 그 위에 밀랍을 입힌다. 이는 옷감의 바탕색을 염색할 때 바띡 문양이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바탕을 염색할 때는 주로 식물이나 나무껍질을 이용한 천연 염색기법을 우선시한다.
바띡 문양을 그리는 일 이외의 공정은 대개 남성이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양질의 바띡을 얻기 위하여는 2~3주가 걸리기도 하며 인도네시아에서 바띡으로 유명한 곳은 족자, 솔로, 뻐깔롱안 등이다. 각 지역마다 다소 변별적인 특징이 있는데 족자의 바띡이 대체로 유연한 색상인 것에 비하여 해안 지역인 뻐깔롱안 지역은 강렬한 색상이 주류를 이룬다.
바띡을 상업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이래 인도네시아에서 전통적 수공 바띡 생산이 수요를 따를 수 없었다. 그래서 19세기 초에는 자연히 유럽에서 도입된 프린팅 기법으로 바띡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바띡 산업의 쇠퇴를 초래했다. 네덜란드로부터의 광목 수입이 어려워지면서 바띡 가격이 상승했으며 생산업자들은 이에 편승하여 대량으로 생산해냈다. 그 결과 가격이 떨어지고 재고도 바닥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에 네덜란드 식민통치 정부는 1918년부터 광목을 다시 수입하여 바띡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나 바띡 산업은 쉽게 살아나지 못했다.
바띡은 적어도 왕조난 식민통치정부 시대에는 개인의 사회적인 지위를 나타내는 의상이었다. 예를 들어 부러진 칼을 모티브로 한 바띡은 족자나 솔로의 왕족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모티브가 위기에 처한 라덴 빤지라는 영웅을 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바띡은 자바 전통사회에서 출생, 결혼, 사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자바 사람들이 죽었을 때 시신을 감싸는 천으로 이 바띡천을 사용하며 결혼을 하는 신혼부부도 행복을 염원하며 바띡을 사용한다. 바띡은 옷감으로뿐만 아니라 작품으로도 보존된다. 유명한 바띡 장인의 작품을 표구하여 벽면에 걸어두기
도 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바띡 분야의 대가인 이완(Iwan Tirta)은 인도네시아의 바띡 산업이 영역을 넓혀 숄이나 스카프 등의 형태로도 사용되는 등 전망이 밝다고 하였다.
글·사진 | 고영훈
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