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남한강 줄기 중에 여주를 감싸도는 100리 구간을 특별히 여강이라 한다. 신륵사는 여강 가에서도 풍광이 아름다운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세종 영릉의 원찰이다. 사찰이 강가에 있다 보니 홍수와 범람으로 재해가 많아 용에 관련된 설화가 많고 세 가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첫 전설은 원효대사 이야기다. 어느 날 원효대사가 꿈을 꿨다. 꿈에 흰옷 입은 노인이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 터라고 말했다. 대사는 기도로 아홉 마리의 용을 승천시킨 후 그곳에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두 번째 전설은 고려 우왕 때 여주 마암(馬岩)부근에 나타난 포악한 용마(龍馬)를 다스린 나옹선사 이야기다. 용마가 농산물을 짓밟고 사람들을 해쳐 괴롭히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로 그 말을 다스렸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고려 고종 때 인당대사 이야기인데, 역시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운 용마가 나타나 인당대사가 고삐를 잡아 제압하여 신력의 神과 제압의 勒을 합해 신륵사가 되었다고 한다.
여주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비옥한 지역으로 농사가 잘 되는 곳이다.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로서 최고의 승려였던 나옹선사는 평소에 자주 신륵사에 머물며 당시 유명한 학자요, 우왕의 스승으로 삼은(三隱-목은, 포은, 야은) 중 하나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이곳으로 청해 만났다. 그런데 백성들이 용마에 피해를 당하고 있자 신력을 발휘하여 도와 해결함으로써 전설이 되고 사찰이 더욱 유명해진 것이라고 한다.
1376년 여름, 나옹선사가 회암사 중창불사를 성대히 마치고 나자 유학자들의 시기를 받게 되어 밀양 영원사로 추방당해 가던 길에 신륵사에서 입적하고 만다. 입적하던 날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맑은 하늘에 비가 내렸고, 많은 사리가 나왔으며, 용(龍)이 초상을 주도했다는 설이 전한다. 이색은 나옹선사가 입적한 후 비문을 지었다. 이색 또한 이성계의 부름을 거절하고 신륵사에서 사망했다.
신륵사에는 고려 말기의 문화재가 많다.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신 중심 전각으로, 대들보에 나옹선사의 필적이라 구전되는 천추만세(千秋萬歲) 현판이 걸려 있다. 극락보전 앞 다층 석탑은 용과 구름 문양을 조각한 뛰어난 석탑인데, 자연환경에 약한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유실이 심해 원래 몇 층이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대들보가 없는 조사당은 여말 불교계를 빛낸 지공, 나옹, 무학 세 선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데, 지공은 인도로부터 우리나라에 와서 계법을 전한 고승으로 그 제자가 나옹이고, 나옹의 제자가 무학이다.
조사당 앞에는 무학대사가 스승을 기리기 위해 심은 향나무가 서 있다.
또한, 신륵사에는 벽절, 벽사라는 별명이 있는데, 그 이유는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시대 7층 전탑이 있기 때문이다. 전탑은 흙벽돌을 구워 쌓은 탑인데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사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있다.
조사당을 지나 구릉에 오르면 무학대사가 스승 나옹의 묘자리로 정했다는 종모양의 부도가 있다. 부도의 탑신은 조각이 없이 중후한 멋을 지니고 정상에 화염문의 보주가 얹혀있다. 이후 조선시대 부도의 대부분이 이러한 형태를 띠게 된다. 나옹선사의 부도비는 고려 후기의 전형적인 비석으로 목은 이색의 글을 당대 최고의 서예가 한수가 해서체로 쓴 것이다. 나옹선사를 화장한 곳에는 삼층석탑이 서 있고, 옆으로 나옹의 당호를 따서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 정자가 있다.
이처럼 나옹선사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신륵사는 지역 학생들에게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소질을 개발하며 창의력과 예술적 표현 능력을 신장시키기 위하여 나옹예술제를 개최하고 있다.
여주 사람들은 여주팔경 중의 첫째로 신륵사의 저녁종소리가 강가에 울려 퍼지는 것을 꼽고 있다. 강가에 서 보니 역사적 인물 나옹선사와 이색의 자취가 가득한 신륵사의 전탑 아래 고즈넉한 강물 위로 목선이 한가롭다.
글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