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보적사는 401년(백제 아신왕10년)에 백제가 독산성을 축조하며 같이 창건한 고찰로 임진왜란에 도원수 권율 장군의 기지가 있었던 독산성의 영욕과 함께한다.
보적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보릿고개에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노부부가 있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겨우 쌀 두 되만이 남아 그걸 먹고 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노부부는 밥을 지어 먹고 며칠을 더 사느니 차라리 남은 쌀을 부처님께 공양하고 죽자고 결심하였다. 노부부가 쌀을 부처님께 바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비어있던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었다. 이후로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 쌓이는 신통력 있는 절이라 하여 보적사란 이름이 붙었다.”
보적사는 남한산성의 장경사나 북한산성의 중흥사처럼 군진 속에 있는 사찰이다. 따라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군사들의 사기 앙양을 위해 특별히 부처님의 가호를 빈다. 당시 독산성의 2천 명이 넘는 군사 중에는 승군(僧軍)도 많았다. 임진왜란에 승려들이 산성의 병사들 못지않게 활약이 컸기 때문이었다.
독산성
독산성(=독성산성)은 삼국시대에 백제가 쌓은 석축산성이다. 한강 하류 위례성에 수도를 둔 백제가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에 성을 축조한 것이다. 독산성에는 8개의 치(雉)가 있고, 성문은 동, 서, 남, 북 4개에 암문을 포함하여 5개가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독특한 축성 양식인 성벽에 돌출된 모양의 치는 쳐들어오는 적을 전면과 좌우 3면에서 방어하며 물리치기에 유리한 구조다.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에 권율 장군이 독산대첩(세마대첩)을 이루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고, 이를 기념하여 지은 세마대(洗馬臺)가 남아있다.
임진왜란에 왜군이 한양으로 진격할 때 용인, 오산(당시 수원)은 반드시 거치게 되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여러 번 약탈을 당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삼남지역의 우리 군이 주요 거점으로 삼았고, 전라순찰사 권율도 선조 25년(1592년) 12월에 독산성에 진지를 구축하고 대항한 것이다.
당시 독산성전투는 관군과 의병이 긴밀하게 연계하여 이룬 승첩으로 이후 기세를 몰아 행주대첩을 이어가며 왜적에게 넘어간 서울을 되찾을 계기를 마련한 중요한 전투였다.
당시 3만여 왜군은 독산성 주위 3곳에 진을 치고 고립시킨 다음 공격하여 왔지만 권율은 매복과 기습전을 펼치며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지형을 보고 성안에 물이 없을 것이라 여겨 조롱하는 의미로 물 한 지게를 산 위에 있는권율에게 전해 주었다. 사실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은 독산성은 물이 부족하여 극심한 식수난을 겪는 중이었다. 권율은 가토의 속셈을 간파하고 즉시 성 아래의 왜적이 잘 보이는 높은 곳에 말을 끌고 올라가 흰 쌀을 말 위로 쏟아부었다. 멀리서 지켜보는 왜장의 눈에 마치 물이 남아돌아 말을 목욕시키는 것(洗馬)으로 보이게 한 것이다.
이렇게 물 걱정이 없는 것처럼 적을 속이고 있을 때, 남부지방의 의병들이 왜군의 후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왔다. 이에 왜군이 독산성 공격을 멈추고 한양으로 퇴각하려 할 때 우리 군이 적의 퇴로를 기습하여 수많은 왜군을 살상하였는데 이것이 삼천병마골전투의 승리다.
훗날 영조가 독산성에서의 승전을 기억하기 위해 방문하였고, 사도세자도 온양온천에서 환궁하다가 머물렀던 적이 있다. 정조는 풍수지리상 독산성을 허물어야 한다는 주변의 헛소리를 물리치고 이곳을 다녀간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하여 독산성 개축을 단행하였다. 독산성은 또 다시 일제강점기 때 일인들이 세마대를 허물고 주민들을 각처로 분산시켜 폐허가 되었으나 1957년 복원하여 지금과 같이 오산의 자랑이자 우리 국민들이 기억해야 할 귀중한 유적지가 되었다.
글 |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