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2018년 월드컵이 개최된 러시아에서는 많은 이변이 나왔고 전통적인 강호들이 추풍낙엽처럼 예선전에서 사라졌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에 패해 16강에도 들지 못한 독일이다. 이런 국제적 스포츠 게임을 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지만 같은 사람들인데 너무 다르게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던 편견의 오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그 한 예로 러시아 사람이라고 하면 흰 피부에 금발을 떠올리기 쉬운데 의외로 러시아는 다민족 국가로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공존한다. 이런 모습은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영토를 만든 표트르 황제가 남긴 유산인데, 그는 몽골로부터 온 동양의 문화를 없애고자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세인트피터즈버그로 옮기고 프랑스나 영국에서 볼 법한 거대한 규모의 궁전을 건설하며 도시를 재정비하는 등 국가의 정체성을 서유럽 쪽에 기울도록 했다.
그런 표트르 황제에게 의외의 일화가 하나 있다. 아프리카에서 오트만 제국의 술탄을 위해 콘스탄티노플까지 팔려온 노예를 소유하게 된 표트르 황제는 그를 노예의 신분에서 풀어주고 최측근 신하로 책봉하면서 러시아에 흑인 장군이 탄생한다(마치 셰익스피어의 작품 <오텔로>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러시아 드림의 주인공이 바로 푸시킨의 외증조할아버지다. 이렇게 특이한 DNA를 물려받은 푸시킨은 유럽인들과는 구별되는 문화 속에서 창의적으로 자랐다. 그의 작품들은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까지 넘나드는 모습을 보였고 사람들은 그의 매력을 다양한 예술장르로 옮겨 재생산하기 시작했다.
푸시킨은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권총 결투를 주제로 작품을 썼다. 당시 피해사례가 늘어나 러시아에서 금지된 권총 결투였지만 암암리에 퍼져있던 결투가 <예브게니 오네긴> 속에 극적인 사건으로 묘사된다. 훗날 차이코프스키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졌으며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사계>를 중심으로 여러 다른 음악들로 짜깁기된 동명의 발레 작품도 만들어졌다.
권총 결투에는 여러 가지 엄격한 규칙이 존재했다. 먼저 결투자들은 각자 대리인을 통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아야 한다. 결투 대리인의 임무는 분쟁을 결투까지 가지 않도록 중재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예브게니 오네긴> 속 대리인은 중재를 하기는커녕 사건을 크게 만드는 골치 아픈 존재로 묘사된다.
이들의 결투는 바람둥이 오네긴이 친구 렌스키의 약혼녀를 사람들 앞에서 유혹하는 장난을 벌이는 바람에 시작되었는데, 렌스키의 대리인은 오네긴의 사과만 받아오면 되는 것을 자기가 흥분해서 오히려 결투 의지만 확고히 만들어 놓는다. 또한 결투 날 15분 이상 지각하는 자가 자동적으로 패한다는 룰조차 무시하고 1시간이나 늦은 오네긴을 끝까지 기다려 싸움을 붙였다.
그런데 이때 오네긴은 대리인을 동행하지 않고 그저 눈에 띈 평범한 하인을 대리인으로 지정해버린다. 저쪽에서 국방부 장관이 나오면 이쪽도 국방부 장관이 나와야 회담이 성사되는데 일개 사병이 나오면 그건 모욕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국 총을 들고 대결에 들어간다. 이 결투에서 흥미로운 점은 서부의 총잡이처럼 동시에 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쏘는 사람을 정해서 그게 안 맞으면 상대방이 쏘는 순서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먼저 쏘는 순서를 뽑은 오네긴은 친구를 죽이기 싫어 최대한 먼 거리에서 정조준도 하지 않고 쏘았으나 렌스키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 렌스키의 모습은 안타깝게도 푸시킨 자신의 운명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흔히 말하길 가수는 자기 노랫말대로 산다더니 작가도 비슷했나 보다. 푸시킨은 당시 러시아의 대표 미인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결혼했다. 문제는 와이프가 너무나 예뻤던 나머지 항상 뭇 남성들이 추파를 던지는 통에 푸시킨의 머리가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어느새 푸시킨의 아내가 프랑스 남자와 눈이 맞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고, 푸시킨은 아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상대 프랑스 남자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문제는 프랑스 남자는 왕의 경호원이었던 만큼 푸시킨이 총을 당기기도 전에 먼저 총을 쏘았고 하복부 총상을 입은 그는 이틀 후 38살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 황망한 사건을 두고, 황제가 반체제인사로 여겨지던 푸시킨을 제거하고 예쁜 부인까지 덤으로 얻으려 했다는 음모설이 지금도 꾸준히 회자 되고 있다. 푸시킨이 조금만 참았더라면 지금 얼마나 많은 명작들이 남았을까?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가 아니면 그저 허세에 불과한 것인가. 우리는 거래를 하면서 이상한 모험을 하는데 그게 바로 허풍이다. 그런데 지금 세계정세는 그냥 모두 허풍게임이다. 최악의 결과를 모두 두려워하지만 대박을 위해 모험을 하는 모습이다. 요즘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으로 인한 유탄이 우리나라 어느 산업에 떨어질지 예상이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예의 주시한다는 논평 이외에는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인다. 고구마를 삶아 먹은 듯 별 진전이 없다. 다만 푸시킨의 오네긴처럼 그냥 대충 던졌는데 재수 없어 돌에 맞아 죽는 렌스키 같은 개구리 신세가 안 되길 기도할 뿐이다.
글 | 신금호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오페라로 사치하라' 저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
영국 왕립음악원(RSAMD) 오페라 석사, 영국 왕립음악대학(RNCM) 성악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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