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dro Botticelli - Trial of Moses - 1481-1482- Sistene Chapel- Vatican - Rome
Sandro Botticelli - Trial of Moses - 1481-1482- Sistene Chapel- Vatican - Rome

[아츠앤컬쳐] 이전 칼럼들에서 붉은색과 파란색, 검은색을 다룬 것에 이어 이번 호에는 녹색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녹색은 신이 창조한 색으로, 창조의 둘째 날인 창세기 1장 11~13절의 각종 야채와 자연의 씨앗에 관한 구절들과 결부된다. 서양 문화에서 녹색의 의미는 모호하지는 않지만, 양면성을 지닌다. 한편으로는 생명, 행운, 희망을 상징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무질서와 독, 악마와 그의 모든 창조물들을 대변하기도 한다.

염색사에서와 같이 회화에서도 녹색은 불안정한 성질을 지니며, 수 세기에 걸쳐 소년기와 사랑, 희망, 운, 놀이, 기회, 금전 등 변덕스럽고, 일시적이며, 변화하는 것들과 관련되어왔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자연의 색으로 불렸고, 이후 자유와 건강, 위생, 운동 그리고 환경의 색이 되었다. 인간은 그림을 그리거나 염색을 하기 전부터 자연의 색을 관찰했다. 그들은 색에 감탄했고, 이를 구별하고, 마침내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초기 염색 기술이 번성함에 따라 색을 판단하기도 했다. 인간의 정착기엔 녹색이나 파란색보다는 붉은색과 노란색을 사용하여 염색했다.

식물 세계에 편재하는 녹색은 어려움 가운데 인간이 가장 늦게 재현하고, 제조 및 통달한 색이다. 이러한 점은 서구에서 녹색이 오랫동안 부수적인 색상으로 남아있었으며, 사회생활이나 종교의식 및 예술적 요소로서의 본질적 역할을 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한다.

Flora - fresco XIV-XV A.D.- Villa Ariana -Pompei - Italy2
Flora - fresco XIV-XV A.D.- Villa Ariana -Pompei - Italy2

고대 이집트에서 녹색은 재생과 재탄생의 상징이자, 나일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진 작물들의 상징이었다. 무덤의 벽이나 파피루스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집트 화가들은 시나이 서부와 동부 사막에서 추출한 말라카이트를 곱게 갈아서 사용했다. 투탕카멘왕의 무덤 안에서 말라카이트 안료가 든 물감 상자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외에도 화가들은 녹색을 사용하기 위해 녹지대에서 추출한 안료를 쓰거나 또는 황토색과 청색을 혼합하기도 했다.

Limbourg Brothers- October- manuscript 1412-1416
Limbourg Brothers- October- manuscript 1412-1416

일부 고대 언어에서는 녹색의 명칭에 대한 색채적 특징과 단어와의 연관이 어려울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어로 녹색을 지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녹색과 다른 색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이름 자체가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고학적 발견물이나 프레스코화에는 파란색이나 붉은색 또는 검은색과 비교해 녹색으로 보이는 흔적이 모호하다. 그리스인과 달리 라틴인은 어려움 없이 녹색을 “비르디스(virdis)”라는 단어로 지칭했는데, 그 뿌리는 번영과 힘, 인간, 봄 등을 상기시키는 일련의 단어에서 유래했다. 특히 로마인들은 녹색을 제조하기 위해 기술을 개발하였고, 구리와 모래, 칼륨을 혼합하여 인공의 녹색 안료를 만드는 방법을 체득했다.

Fresco - 79 A.D. - Villa dei Misteri- Pompei - Italy
Fresco - 79 A.D. - Villa dei Misteri- Pompei - Italy

따라서 많은 의복들이 녹색으로 염색되었고, 제국들의 창은 녹색이었으며, 적어도 가장 부유한 로마인들 사이에서 녹색은 예술 작품과 일상생활에 많이 쓰였다. 1세기부터, 황금궁전(Domus Aurea)을 비롯한 로마의 몇몇 빌라들과 폼페이 지역 주택들이 녹색으로 장식되었다. 로마의 모자이크는 파란색과 녹색으로 되어있으며, 녹색 장식은 건축의 다색장식을 불러왔다.

Sandro Botticelli – Trial of Moses – 1481-1482- Sistene Chapel- Vatican – Rome
Sandro Botticelli – Trial of Moses – 1481-1482- Sistene Chapel- Vatican – Rome

중세기에 이르러 녹색은 발전기를 맞이했다. 당시 녹색은 아름다운 색으로 간주되었는데, 오늘날 우리의 수색표준(水色標準)의 척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기의 녹색은 대부분 작은 모형들에 사용되었다. 사실상 이 천연 추출물은 수도사의 고고학적 인쇄물들을 뚜렷하게 하는 데는 이상적이었지만, 제단을 장식하기에는 충분한 내구성을 지니지 못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의복 색깔은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직업을 나타내었다. 붉은색은 귀족만이 입을 수 있었고, 갈색과 회색은 농민이, 녹색은 상인과 은행가, 귀족 및 그 가족이 입을 수 있었다.

Giorgione - The Tree Philosphers - 1506-1508Kunsthistorisches Museum - Wien
Giorgione - The Tree Philosphers - 1506-1508Kunsthistorisches Museum - Wien

모나리자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아르놀피니 부부(Coniugi Arnolfini)’의 신부와 마찬가지로 녹색으로 칠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 화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안료들은 매우 다양했고, 수도사들은 필사본에 색을 입히기 위해 청록색을 사용했다. 하지만 녹색은 화학적으로 불안정한 것처럼 보여 젊음과 행운, 운명과 같이 변하고 변덕스러운 것들과 결합되어 나타났다.

Paolo Uccello- Saint George and the Dragon- 1460- National Gallery London
Paolo Uccello- Saint George and the Dragon- 1460- National Gallery London

녹색이 항상 선, 자연, 번영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색채의 불안정성 때문에 마녀, 독, 악, 악마의 색으로 간주되기도 했으며, 따라서 위대한 르네상스 화가들이 녹색을 사용했으나, 수 세기 동안 호평을 얻지 못했다. 당시 악마는 홀로 존재하거나 혼자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짐승들과 악한 생물들의 행렬을 동반한다고 믿었다.

중세 말에 이들 중 상당수는 녹색과 연관되어 나타났으며, 온갖 악덕과 고문을 통해 인간을 괴롭히고 소유하려 하는 악마의 “군단”으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뱀은 녹색으로 칠해졌으며, 이는 독사나 살모사, 용과 같은 악의적이고 해로운 성질을 표현했다. 서양의 용은 아시아 문화에서처럼 행운과 선의 상징이 아니라, 악의 상징으로 알려져 왔다.

Sandro Botticelli- Born of venus -1485–1486 – Galleria degli Uffizzi- Florence Italy
Sandro Botticelli- Born of venus -1485–1486 – Galleria degli Uffizzi- Florence Italy

이후 녹색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Nascita di Venere)’에서처럼 선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조르조네(Giorgione)와 같은 화가들과 베네치아의 르네상스 화파들에게 녹색은 성공을 가져다주었으며, 북유럽 전역에서 당대 최고의 화가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녹색은 연금술과 문학, 염색, 무엇보다도 회화에 있어서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을 제공하지만, 추후 더 깊은 소재들을 다루기로 하고 이만 서론의 서사를 맺는다.

번역 | 길한나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글 | 로베르토 파시Basera Roberto Pasi
Journalist, Doctorate Degree University of Siena(Literature, Philosophy, History of Art with honors), Study at Freiheit Unverisität Berlin, Facilitator at Osho Resort, Poona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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