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2,800년의 역사가 구석구석 배어있는 로마는 예로부터 시대, 국적, 종교, 인종을 초월하여 수많은 여행자들과 순례자들이 전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몰려오는 도시이다. 로마를 찾은 사람들은 골목이나 광장에서 크고 작은 분수들이 물을 뿜는 것을 보고는 기쁨과 활력을 느낀다. 로마 중심지에서는 역사적인 ‘족보’가 있는 분수만 꼽아 봐도 100개가 넘고 그중 상당수는 수준 높은 예술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트레비 분수는 로마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품 분수로 꼽힌다.
트레비 분수는 조각과 건축이 융합된 후기 바로크 시대의 걸작품으로 1762년에 완공되었다. 이 분수를 전체적으로 보면 공간의 구성이 격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조개껍질 모양의 마차에 올라선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 앞 양쪽에는 바다의 신 트리톤과 사나운 말이 하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광경 뒤에는 수직의 기둥들, 좌우의 조각상, 그리고 육중한 돌림띠를 두른 르네상스 건물의 벽면이 이 격정적인 무대를 조율하고 있다. 또 매끄럽게 깎은 돌 수반이 주는 부드러운 느낌은 거칠고 울퉁불퉁한 바위와 강한 대비를 이루며, 분수의 물은 작은 폭포가 되어 수반에 흘러내린다.
트레비 분수의 물은 매우 맑다. 그런데 이 물은 그냥 수도관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멀리 떨어진 산악지로부터 특별한 지하수로를 통해 오고 있다. 이 지하수로는 기원전 19년에 아그리파가 건설한 것이다. 로마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던 그는 전장에서는 뛰어난 장군이었고 평화 시에는 요즘으로 말하면 국토부장관이었는데, 아들이 없던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사위로 삼아 후계자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아그리파는 이 지하수로를 아쿠아 비르고(Aqua Virgo), 즉 ‘처녀수로’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이 ‘처녀’는 누구일까? 혹시 그가 몰래 짝사랑하던 아가씨였을까? 하지만 당시 그는 이미 아우구스투스의 딸과 결혼한 몸, 즉 황제의 사위라는 엄청난 지위를 지닌 공인이었으니 함부로 그럴 수는 없었을 거다. 사실 이 문제의 처녀는 이름도 성도 모른다. 오로지 전설에만 등장한다.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여름날, 아그리파의 병사들이 로마 근교 산악지대에서 물이 있는 곳을 찾다가 더위와 갈증으로 완전 녹초가 되었다. 이때 갑자기 웬 처녀가 나타나 눈이 휘둥그레진 병사들에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병사들은 마법에 걸린 듯 처녀를 따라갔다. 얼마 후 처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를 파보라는 듯 땅바닥을 가리키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병사들이 그곳을 파자 신선한 물이 콸콸 솟았다.
아그리파는 그곳을 상수원으로 하는 지하수로를 건설하고는 이 신성한 처녀를 기념하여 ‘처녀수로’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다. ‘처녀’는 순결을 의미하니 물이 그만큼 맑다는 뜻이 아닐까? 트레비 분수의 배경을 이루는 벽면 윗부분에는 이 전설의 내용을 담은 두 개의 조각이 좌우에 있다. 왼쪽은 아그리파가 수로 건설 계획을 검토하는 모습이고, 오른쪽은 처녀가 물이 솟는 곳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이다.
처녀수로의 길이는 20km가 넘는다. 아그리파는 이 수로를 이용하여 로마 시내에 자그마치 160개나 되는 분수를 만들었다. 그런데 수원지와 트레비 분수 사이의 낙차는 불과 4m에 불과하다. 즉 수로의 평균 경사는 100m당 2.5mm도 안 되는 셈이니 2천 년 전 로마인들의 측량기술과 시공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처녀수로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8세기에 한 번 복원되었으며, 또 오랜 세월이 지난 15세기에 완전히 다시 복원되어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이 수로는 지금도 트레비 분수뿐 아니라, 포폴로 광장의 분수, 스페인 광장의 조각배 분수, 판테온 앞 광장의 분수, 나보나 광장의 분수 등 여러 명품 분수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이 분수들은 로마를 한층 더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고 있다.
글·사진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역사, 언어 분야에서 30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했으며 국내에서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동유럽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외에도 여러 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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