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강화도는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역사의 장이다. 선사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이 천제를 올린 참성단과 그의 세 아들 부소, 부우, 부여가 지은 삼랑성(정족산성)의 이야기가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우리 고조선의 실제를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에는 살수대첩의 명장 을지문덕 장수도 해마다 참성단에서 기도를 올렸으며, 조선 태종도 이곳에서 제천행사를 거행했다고 한다.
전등사를 찾은 날은 백중 회향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래서 법당마다 번이 휘날리고 스님의 불경소리와 함께 그윽한 찬불가가 경내 가득 울려퍼졌다.
삼랑성 안에 아늑하게 자리한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중 최고(最古)의 도량으로 당시 이름은 진종사라 한다.
이 사찰은 특히 고려와 조선에 국난극복 호국도량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고려 1232년,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여 강화도가 임시 도읍이 되었을 때 사찰 경내에 가궐(假闕)을 짓고 대몽항쟁을 하였으며, 팔만대장경 조성 시에도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후, 1282년에 충렬왕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하여 이름이 전등사로 바뀐다. 환도 후에 강화도에 남아있던 많은 문화유산은 안타깝게도 몽골군에게 불태워지고 가궐도 폐허가 되고 말았다.
조선 말 1866년에는 수도 한양 입구인 이곳에서 병인양요가 벌어졌는데, 조선수비대장 양헌수 장군의 지휘로 관군, 포수, 승군이 합심하여 정족산성에서 프랑스함대를 무찌른 바 있다. 이를 기념하여 정족산성 동문 내에 승전비와 비각이 세워졌다. 대웅전 안에 새겨진 당시의 낙서 흔적은 출전 당시 절박했던 우리 병사들의 심정을 잘 보여준다.
긴 세월 속에 전등사도 몇 차례의 화마를 겪었다. 지금의 대웅전은 광해군 때 소실되어 1621년에 중건된 도량이다.
조선은 궁궐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사고에 왕조실록을 보관해왔는데, 임진왜란으로 춘추관과 충주, 성주의 사고가 소실되었다.
당시 화마를 피한 전주 사고본을 베껴 묘향산,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에 실록을 보관하였고, 묘향산에 보관하던 전주본을 마니산 사고를 거쳐 다시 정족산 전등사 안에 사고를 짓고 옮겨놓았다.
전등사는 오랜 역사의 사찰인만큼 내려오는 전설도 많다. 전등사의 수령 500년이 넘는 은행나무에서는 매년 열 가마씩의 은행이 열렸다. 철종 때 조정에서 스무 가마를 바치라고 억지를 쓰자, 도력이 높은 추송 스님이 3일 기도를 한 후 다시는 은행이 열리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탐관오리들이 과욕을 부려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된 것이다.
전등사 보물 중에 으뜸은 바로 대웅보전이다. 조선 중기 건축물로서, 다른 건물과 달리 곡선이 심하여 처마가 들리도록 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이 돋보인다. 내부 불단 위의 닫집은 너무 아름다워 건축공예의 극치라 칭찬받는다. 보마다 용틀임 장식이 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닫집 천장 용가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고 끈을 불단까지 늘어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구룡토음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대웅전의 처마 밑 네 귀퉁이의 나부상 전설은 대웅전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 놓았다. 대웅전을 건축하던 도편수가 사하촌 주모와 눈이 맞아 주모에게 돈을 다 주고 불사가 끝나면 같이 살기로 했는데, 주모가 도주해버린 것이다. 화가 난 도편수는 대웅전 처마 네 군데에 주모가 평생 벌을 받도록 나부상을 새겨놓았다. 혹자는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 중 하나인 원숭이라고 좋게 말하기도 한다.
경내 보물 중에 철종은 특이하게도 중국종이다. 북송시대 1097년에 하남성 숭명사에서 주조된 것으로 우리나라 종과는 달리 종머리에 음관이 없고, 견대와 요대 사이에 팔괘가 둘려 있다. 근세 들어 일제 말 태평양전쟁 시 군수물자 수탈에 빼앗겼으나, 다행히 광복 이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하여 다시 옮겨왔다고 한다. 이런 일이 바로 부처님의 가피가 아닌가 생각한다.
글 |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