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계곡, 사진 동해시설관리공단
무릉계곡, 사진 동해시설관리공단

 

[아츠앤컬쳐] 동해안의 여러 사찰에는 멀리 인도에서 돌로 만든 배를 타고 왔다는 부처의 얘기가 많다. 금강산 건봉사에는 서역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53불이 있고, 경주 기림사에도 천축국의 광유화상이 불상을 갖고 와서 사찰을 창건했다는 설화가 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두타산 무릉계곡에 자리한 삼화사의 철불에도 이와 같은 설화가 전한다. 두타산에 아직 절이 없던 어느 한 옛날에 삼척 포구에 돌로 만든 배가 와서 돛대도 삿대도 없이 미끄러지듯 들어와 정박했다고 한다. 돌배에서는 잘생긴 육척장신 대장부 셋이 내렸다. 이들은 금빛 빛나는 얼굴에 가사를 걸치고 손에는 연꽃을 한 송이씩 들고 있었다. 첫째는 검은 연꽃, 둘째는 푸른 연꽃, 셋째는 금색 연꽃을 들었는데 이들은 바로 서역에서 온 약사불 삼형제였다.

두타산, 사진 동해시설관리공단
두타산, 사진 동해시설관리공단

이들은 곧장 서쪽으로 두타산을 향해 걸어가 먼저 첫째가 삼화촌에 자리를 잡고, 둘째는 지상촌에, 셋째는 궁방촌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언변이 뛰어나고 인품이 훌륭하여,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각기 약사불을 위한 사찰로 흑련대, 청련대, 백련대를 지었다. 얼마간 교화활동을 한 약사삼불은 사람들의 인심이 순해지고 불심이 깊어지자 각기 등신불로 철불을 남기고 떠났다. 약사삼불이 떠난 후 사람들은 스승이 있던 곳마다 절을 지었다. 첫째가 있던 곳에는 삼화사, 둘째가 있던 곳에는 지상사, 셋째가 머물던 곳에는 영은사를 지어 철불에 공양을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효순하며 우애하며 화목하게 살았다고 한다.

동해-삼화사-철조노사나불좌상_문화재청
동해-삼화사-철조노사나불좌상_문화재청

그중에 삼화사 철불은 창건설화에 나오는 약사삼불 중 첫째의 불상이다. 여러 차례 화재와 인위적 훼손으로 손상이 심했으며 골동품 수집상에 팔려갈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1997년에 복원되어 지금에 이른다. 복원 추진 중에 발견된 불상 배면의 명문을 보면, 이두가 쓰여 있고, 불상의 제작 양식이 유사한 보림사, 도피안사 철불과 비교를 거친 결과 860년경에 조성된 신라철조노사나좌불로 밝혀졌다.

철불의 영험함에 관한 설화도 많다. 언젠가 전염병이 창궐하던 때, 한 농부의 아내가 지극 정성으로 공양을 올리며 남편과 식구들의 쾌유를 빌었으나 도무지 낫지 않았다. 이 아낙은 다른 방법을 써보기로 하고 평소에 부처님이 못 드신 음식을 공양하기로 하여 어느 날 스님 몰래 명태를 부처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나왔다. 아낙이 집에 돌아와 보니 그 사이에 온 식구가 다 나아 있었다. 이 소문이 퍼져 다른 집들도 같은 방법으로 기도하여 온 마을에 전염병이 싹 물러갔다고 한다.

삼화사 삼층석탑,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성철
삼화사 삼층석탑,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성철

또 한 번은 한 새댁이 아이를 갖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삼화사를 찾아 기도를 했다. 또 도무지 효과가 없었으나, 한 아주머니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부처님이 색다른 음식인 명태를 좋아하시니 명태를 올려라. 만약에 그래도 효과가 없으면, 부처님이 고기만 받아 자시고 소원을 안 들어준다고 소문을 내버려라. 그러면 부처님이 난처해서라도 해결해 주실 거다.” 새댁은 명태를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부처님 목에 걸고 ‘제 소원을 안 들어주면 부처님이 고기 자셨다고 소문을 낼 거’라고 기도를 했다. 그후 새댁은 옥동자를 낳았다고 한다.

삼화사 창건에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읍지(邑誌)를 보면,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두타산에 흑련대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삼화사라 한다. 여기에도 전설이 하나 얽혀 있다. 신라 서라벌의 귀족 자제인 김재량을 연모한 진골 출신의 나림, 혈례, 골화 세 처녀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김재량은 전쟁에서 죽고 말아, 세 처녀는 두타산으로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가 자장이 사찰을 세우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무릉계곡, 사진 동해시설관리공단
무릉계곡, 사진 동해시설관리공단

또한, 고려 말 승려 석식영암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말에 세 명의 신인(神人)이 이 사찰 자리에 머물다 가버린 후 이곳에 절을 짓고 삼공사(三公寺)라 하였다고 한다. 후에 조선 태조가 신인(神人)이 절터를 알려준 것이 신기하다고 하여,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해 절 이름을 삼국이 화합하여 통일이 되었다는 뜻으로 삼화사라고 고쳤다.

고적(古蹟)에 의하면, 약사삼불인 백, 중, 계 삼형제가 서역에서 동해로 돌배를 타고 와서, 맏형은 흑련대에, 둘째는 청련대에, 막내는 금련대에 각각 머물렀고 이곳이 지금의 삼화사, 지상사, 영은사가 되었다고 한다. 삼화사에는 철불 외에도 신라의 삼층석탑이 있는데, 이는 동해안에서 보기드문 수작으로 꼽히는 문화재로 9세기 중엽의 작품이다.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허, ⓒ한국학중앙연구원 유남해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허, ⓒ한국학중앙연구원 유남해

고려 말 이승휴는 외가가 가까운 삼화사 옆에 암자를 짓고 ‘제왕운기’를 저술하였는데, 살던 암자를 삼화사에 희사하고 간장암이라고 명하였다.

두타산은 삼국시대의 국경이 갈라지는 태백산맥 줄기에 있어 늘 긴장하고 전쟁이 자주 벌어지는 곳이었다. 후삼국시대에도 마찬가지였고 고려 말에도 공양왕이 삼척에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문헌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가 건국과정에서 희생된 영혼을 위무하고 고려 유민과 친 고려 세력을 포용, 화합하기 위해 조선 초기부터 국행수륙대재(國行水陸大齋)를 설행해왔다고 한다. 국가무형문화재 삼화사 국행수륙대재는 온 천지와 수륙에 존재하는 모든 고혼의 천도를 위한 의례로서 개인 천도의 성격을 띤 영산재에 비해 공익성이 두드러진다.

삼화사는 선비들이 즐겨 찾던 풍류공간이며 동해안에서도 제일의 산수를 자랑하는 무릉계곡에 자리한다. 주변에는 두타산성, 오십정, 용추폭포, 학소대 등 명소가 많아서 사시사철 조용한 휴식과 명상을 위해 찾는 발길이 많다. <삼화사 홈페이지, 문화재청,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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