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과 향수의 캐논
[아츠앤컬쳐] 러시아 로망스 시기의 대표적인 노래인 ‘먼 길을 따라’는 기억의 단면들을 좇아가는 몰입감을 느끼게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달리는 생각들 사이로 겹겹이 포개지는 감정들은 마치 캐논 곡의 종지부와 같이 성찰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작곡가인 보리스 포민(Boris Fomin)의 손에서 탄생한 이 곡은 슬라브 민족의 전통 스타일에 집시풍의 바이올린과 7현 기타, 만돌린, 아코디언 등이 어우러져 고조된 감정을 살려낸다. 가사 곳곳에 심겨 있는 방랑하는 사고 역시 내면에 존재하는 추억의 불씨들을 파편처럼 날아오르게 한다.
보리스 포민과 시인이자 작사가였던 콘스탄틴 포드레프스키(Konstantin Podrevsky)의 우정은 1924년의 ‘먼 길을 따라’로 결실을 맺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들은 이후 30여 곡을 함께 작업했는데, 잘 알려진 곡으로는 ‘지나간 청춘(Молодость прошедшая)’, ‘사모바르 옆에서(У самовара)’, ‘슬픔의 노래(Скорбная песня)’, ‘여명(На заре)’ 등이 있다. 포민의 작품들은 러시아적 색채감과 현대적 세련미를 모두 충족한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살아생전 정권의 비난을 야기하던 그의 대중적 성향 또한 오히려 현재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로 꼽힌다.
그는 20-30년대의 러시아 로망스 장르에 샹송이나 리트와 같은 유럽의 아트 송과 러시아적 감수성, 민속적 감흥을 녹여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정권하에서 늘 탄압과 박해의 대상이었다. 당시 로망스 장르 자체를 반혁명적 음악으로 규정하던 정치권은 그의 대표곡들에 금지령을 내렸고, 이후의 위대한 애국전쟁 등의 정세적 변화는 음악 활동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통제했다. 결국 1948년, 그는 향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오로지 그가 남긴 400여 곡들이 그의 목소리를 대변할 뿐이었다.
“방울 소리 울리며 트로이카를 타고 떠난 밤, 거리의 불빛은 반짝였네. 아! 작은 매들아, 슬픔을 떨쳐버릴 수만 있다면 너희를 따라가고 싶구나! 달빛 아래 먼 길을 따라 울려 퍼지는 노래와 일곱 줄의 기타 소리가 밤마다 나를 괴롭힌다. 되돌릴 옛사랑 없이 고통의 삶이 끝난다면 나를 묻을 곳에 데려가다오!”
‘먼 길을 따라’는 40여 년 뒤 웨일스의 가수인 메리 홉킨(Mary Hopkin)의 리메이크로 세계적 선풍을 일으켰다. ‘Those Were the Days’로 잘 알려진 이 곡의 개사는 유진 래스킨(Eugene Raskin)이 맡았는데, 그는 러시아 출신의 미국 작가이자 가수로, 러시아어 문맥의 감상점을 영어의 흐름에 잘 녹여내는 특질을 보였다.
자연스럽고 부드러우며 순수함을 머금은 홉킨의 목소리 역시 원곡의 고조된 감수성보다는 일렁이는 추억을 서정적으로 잘 전달했다. 그녀의 버전은 인생의 변화와 흐름 가운데도 여전히 자리하는 기억의 순간을 담백하고 진실한 어조로 들려주었다.
‘Those Were the Days’의 인기는 이후 여러 아티스트의 재해석으로 나타났는데, 곧 장르와 퍼포먼스의 다양성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각기 다른 커버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매력 가운데 원곡의 감동이 지속적으로 재현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나 엘튼 존(Elton John)의 라이브에서도, 제인 번넷(Jane Bunnett)이나 빌 에반스(Bill Evans)의 재즈 플레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불어 요요마(Yo-Yo Ma)의 단출한 첼로 솔로나, 런던 필하모닉의 서사적 오케스트레이션에서도 동일하게 감동이 재현된다. 생각건대 회상과 향수의 순간은 먼 길을 걸어 생을 마감하는 모든 이에게 똑같이 아름답고 소중하며 특별하기 때문이리라.
글 | 길한나
보컬리스트
브릿찌미디어 음악감독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stradakk@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