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탄도 울고 갈 ‘숙성의 미학’

 

[아츠앤컬쳐] 아드리아해의 1월은 생각보다 혹독하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북풍 ‘부라(Bura)’가 불어 닥치면, 두꺼운 외투를 입은 여행자들도 옷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을 친다. 하지만, 이 시기 크로아티아의 골목길은 찬 바람을 뚫고 나오는 쿰쿰하고 구수한 향기로 가득 찬다. 바로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영혼의 닭고기 수프’이자 겨울 생존 식량, ‘사르마(Sarma)’가 끓고 있는 냄새다.

오스만 제국에서 건너와 ‘발효’를 입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르마의 뿌리가 크로아티아가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 덕후라면 이름에서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싸다, 말다'라는 뜻의 튀르키예어 ‘Sarmak’에서 유래한 이 요리는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확장과 함께 발칸반도로 넘어왔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이 이국의 요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뜻한 지중해나 중동에서는 포도잎에 고기를 싸 먹었지만, 내륙의 혹독한 겨울을 나야 했던 크로아티아인들은 기막힌 ‘현지화’ 전략을 세운다. 바로 가을 내내 소금에 절여 푹 삭힌 ‘양배추(Kiseli Kupus)’를 사용하는 것이다.

마치 한국의 김장 문화처럼, 그들은 겨울이 오기 전 거대한 통에 양배추를 절인다. 오스만 제국이 남기고 간 ‘고기 쌈’ 기술에 슬라브 민족 특유의 ‘발효 과학’이 만나, 사르마는 원조를 뛰어넘는 독창적인 요리로 재탄생했다. “터키 사람들은 사르마를 발명했지만, 그것을 완성한 건 우리다”라는 크로아티아인들의 귀여운 자부심이 들리는 듯하다.

“사르마는 3일째가 제일 맛있다?” 미스터리한 사르마의 법칙

크로아티아에는 사르마와 관련된 재미있는 ‘불문율’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절대로 사르마를 한 끼 분량만 만들지 말 것”이다. 한국의 곰국처럼, 사르마는 한번 만들 때 집에서 가장 큰 솥(Lonac)을 꺼내 수십 개를 만들어야 제맛이 난다.

현지인들 사이에는 “사르마 수학의 법칙”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첫날 먹는 사르마가 100점이라면, 이튿날 데워 먹는 사르마는 120점, 3일째는 200점이다.” 며칠 동안 뭉근하게 데우고 식히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함께 넣은 훈제 갈비와 소시지의 향이 양배추 깊숙이 배어들고 국물은 진득한 소스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로아티아 어머니들은 자취하는 자녀들에게 락앤락 대신 거대한 냄비째 사르마를 들려 보내곤 한다. 일주일 치 식량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카더라’ 통신은 사르마가 최고의 해장 음식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크로아티아의 결혼식 피로연은 새벽까지 이어지기로 유명한데, 파티가 끝날 무렵 지친 하객들에게 마지막으로 내놓는 음식이 바로 사르마다. 발효 양배추의 시원한 산미와 뜨끈한 고깃국물이 숙취를 날려주고, 다시 춤출 힘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겨울을 견디게 하는 붉은 냄비의 마법

사르마의 조리법은 한국인의 식욕을 자극하는 지점과 맞닿아 있다. 다진 돼지고기와 소고기, 쌀을 섞어 소를 만들고, 시큼하게 푹 익은 양배추잎으로 꼼꼼히 감싼다. 여기에 파프리카 가루를 듬뿍 넣어 붉은빛을 내고, 훈제 고기(Suho meso)를 넣어 깊은 풍미를 더한다. 한국의 ‘묵은지 찜’과 놀랍도록 닮아 있어, 한 입 먹는 순간 지구 반대편에서 고향의 맛을 느끼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1월의 크로아티아 식탁에서 사르마는 단순한 요리가 아니다. 밖에서 꽁꽁 언 몸을 녹여주는 난로이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정을 나누게 하는 매개체다. 커다란 냄비 가득 담긴 사르마가 줄어드는 속도만큼, 길고 지루한 겨울도 조금씩 지나간다.

혹시 1월에 크로아티아를 여행한다면, 화려한 관광 식당보다는 현지인들이 가는 소박한 식당(Konoba)을 찾아 으깬 감자(Pire krumpir)를 곁들인 사르마 한 접시를 주문해 보자. 부드러운 양배추 쌈을 잘라 입에 넣는 순간, 왜 그들이 “사르마 없이는 겨울을 날 수 없다”라고 말하는지 단번에 이해하게 될 것이다.

 

글 ㅣ 김수정

(주)파인푸드랩 대표 | 한국식음료세계협회 회장 | 경희대학교 캠퍼스타운, 서울먹거리창업센터 멘토 12년 경력의 식품 개발 전문가, 한식진흥원 및 다수 기업/지자체 레시피 개발 및 강의 이력 chefcrystal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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