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alth(Simon Vouet, 1635~1640)
Wealth(Simon Vouet, 1635~1640)

[아츠앤컬쳐] 시몽 부에(Simon Vouet, 1590~1649)는 약간은 낯선 이름일 수 있다. 시몽 부에는 프랑스 바로크 시대 최고의 화가는 아니지만, 그 당시 왕실 화가로 활동하면서 시대를 주름잡았던 인물 중의 하나이다. 어린 나이에 이미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려 14세에 영국으로 가서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던 그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다가 1627년 루이 13세(Louis XIII)의 요청으로 파리로 돌아와 궁정의 수석화가가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바로크 회화 양식을 프랑스에 소개했으며, 그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바로크 양식이 탄생하게 된다. 파리로 돌아오면서 그는 밝은 색채를 사용하는 회화 스타일로 자신의 화풍을 변모시켰다. 그는 궁정의 화려하고 향락적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은 프랑스 장식회화의 창시자로 기나긴 내전으로 침체기에 있었던 프랑스 미술을 되살리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많은 조수와 제자들을 거느리고 궁전과 귀족들의 저택, 교회를 위하여 화사하고 장식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다.

역동적이면서도 화사한 색채를 즐겨 사용하였다. 이러한 화풍의 시몽 부에는 프랑스의 루벤스(Peter Paul Rubens)라고도 불렸으며, 파리로 돌아오면서 약 10여 년 동안 파리의 미술계를 지배했다. 그의 아틀리에에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었으며,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을 비롯한 다음 세대의 대표적인 화가가 배출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초중반 프랑스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시몽 부에의 입지가 흔들리게 된 것은 루이 13세의 초청으로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이 파리로 오게 된 1640년부터이다. 푸생은 파리에 오자마자 단번에 루이 13세의 눈을 사로잡았고, 시몽 부에는 갑자기 뒷전으로 밀려나 버린 것이다.

Sophonisba Receiving the Poisoned Chalice(Simon Vouet, 1623)
Sophonisba Receiving the Poisoned Chalice(Simon Vouet, 1623)

물론 시몽 부에 측의 텃세와 크고 화려한 그림을 그려줄 것을 요구하는 파리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푸생은 2년 만에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간다. 그러나 푸생은 파리에 머문 짧은 2년 동안 파리 화단의 젊은 화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지나치게 서정적이고 화사한 시몽 부에 화풍에서 점차 순수한 화풍으로 돌아가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실제 이런 큰 그림을 화가가 혼자서 그릴까? 시몽 부에도 많은 조수 및 제자들을 거느리고 그림을 그렸고, 푸생에게 부렸다는 텃세도 시몽 부에의 조수나 제자들이 푸생의 작품 활동을 돕지 않았던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만큼 조수나 제자들의 도움은 상당히 중요하다.

대단한 화가였던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와 달리 사회성이 뛰어나,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렇다고 유력자의 호의를 거스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라파엘로는 유능한 조수를 고용하여 공동 작업이라는 묘책을 짜낸다. 그는 주로 그림의 아이디어를 내고 화면을 구성한 뒤 탁월한 실력을 갖춘 조수들에게 그림의 제작을 전적으로 위임했다.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와 프란체스코 페니(Giovanni Francesco Penni)는 그 중에서도 유능한 조력자들이었다. 물론 단독으로 제작한 작품들도 있었지만 상당수 작품은 조수가 제작한 작품에 라파엘로가 약간의 마무리 손질을 덧붙인 것이다. 그의 명성은 하루가 다르게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한창때는 50여 명의 조수와 제자들로 그의 아틀리에가 북새통을 이룰 지경이었다.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Simon Vouet, 1620~1622)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Simon Vouet, 1620~1622)

미술품이 예술가 인격의 소산이라는 의식이 강화되면서 조수의 도움 없이 홀로 작업하는 게 대세가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인 19세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근대적인 현상도 20세기 개념미술과 팝아트 이후, 특히 앤디 워홀(Andy Warhol) 이후부터 다시 예전처럼 조수들의 조력을 받는 양태가 확산되면서 많이 와해됐다. 가령,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는 100명 이상의 조수를 고용하기도 했다.

작년 우리나라 유명 연예인의 그림 대작(代作) 사건은 한동안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독특한 구상과 색채의 결합으로 창작한 ‘화투 그림’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미술가로서도 평단과 관객의 주목을 받아왔고, 그에 따라 이 작품들의 가격 역시 이러한 평가를 반영하여 높게 형성되었다. 그러던 미술 작품들 대다수가 제3자에 의하여 대부분 그려진 것이고 유명 연예인은 작품에 서명을 하였을 뿐이라는 폭로가 이어졌고, 이에 사기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사건은 사기죄가 해당하는지 여부가 쟁점이 되었다.

사기죄는 사람을 기망하여 이에 속은 상대방으로부터 재물을 교부받아 성립하는 범죄이다(형법 제347조). 이 사건은 실제로 연예인이 창작하여 그린, 자신의 저작물인 미술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실제 자신이 창작하여 그린 자신의 미술 작품인 것처럼 거짓말을 하여 이에 속은 사람들로부터 형성된 가격대로 작품가격을 받은 것이 사기죄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문제되었다.

이에 관하여 연예인 당사자는 실제 자신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자신이 고용한 조수에게 작품 창작의 방향을 지시하였으므로 문제된 작품들이 자신이 창작하여 그린 미술 작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어 거짓말한 사실이 없다는 점을 들어 기망행위를 부정하였고, 특히 이러한 작업 방식은 대한민국의 일반 미술계에서 널리 채택되는 ‘미술계의 관행’이라고 주장하였다.

당 연예인을 사기 혐의로 기소한 검찰에서는 연예인 당사자가 고용한 조수가 미술 작품의 90% 정도를 그렸고, 연예인 당사자는 가벼운 덧칠만을 한 뒤 자신의 서명을 남긴 것이므로 해당 미술 작품들은 연예인 당사자가 창작한 작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고가의 미술작품 대금을 지급받았고, 이러한 행위는 미술계의 관행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1년 6개월을 구형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1심 법원은 문제된 미술 작품들이 연예인 당사자의 창작물인 미술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하여, 제3자가 대부분을 그리는 방식으로 그려진 미술 작품이 연예인 당사자가 창작한 미술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사기죄를 인정하였다.

특히 재판부는 조 모씨가 악의적으로 일반 대중들을 기망하려고 한 것은 아니나, 이 사건 이후 언론을 통한 해명에서 자신이 채택한 방식이 미술계의 관행이라는 점을 주장하여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비교적 피해액이 큰 것을 고려하여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다.

글 | 이재훈
문화 칼럼니스트, 변호사,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혁신제도연구팀장, (주)파운트투자자문 감사

저작권자 © Arts & Cultur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