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현대의 예술 세계는 우리들의 복잡해진 사고와 많은 부분이 얽혀 있다. 현대인은 잠시 동안이나마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고, 화가들은 자신들이 펼치는 또 다른 세계로 현대인들을 초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꿈의 무대 같은 창작 세계를 그리는 작가들 중에서 사실상 최초의 작가이면서도 명성이 오래 지속되고 있는 작가가 바로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이다. 키리코는 고대 그리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아우르는 회화 세계를 펼친 형이상학 회화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형이상학 회화는 이탈리아에서 생겨난 회화 양식으로, 작품이 기괴하고 부자연스러운 형상을 가지고 있어 보는 이에게 낯설고 불안한 느낌을 자아낸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여러 물건들이 하나의 공간에 배치되어 철학적인 메시지를 주는 작품들은 1920년대의 초현실주의자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키리코의 작품들도 신비한 공간 안에 각기 의미가 부여된 물체들이 나열된 모습으로 대부분 철학적이다. 키리코의 작업 방식은 어떤 건물이나 사물의 형태를 그릴 때, 그대로 대상을 복제하지 않고 느낌 그 자체만을 가져오기 위해 일부 요소만을 차용한다. 어린 시절의 부모님의 모습, 그림자, 그리스 신상 등 자신의 기억 속의 대상이 서로 융합되고 그 색과 형태에 의미가 부여된다. 결국 기억에 의존하나 출처는 모호해지며, 총체적인 인상은 상징적 이미지로 전환된다. 키리코가 작품 속에 드러낸 수수께끼 같은 기호는 ‘모든 환상을 만들어내는 원천’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키리코의 <어느 가을날 오후의 수수께끼(The Enigma of an Autumn Afternoon)>(1910)가 제작될 당시에는 ‘형이상학 회화’라는 장르가 분명하게 존재하지 않았고, 사실상 형이상학 회화라는 개념의 정의조차 불분명했다. 다만, 키리코가 형이상학의 개념을 견지한 상태에서 해당 작품을 완성했다고 보기에는 충분하다. 키리코는 해당 작품을 그리기에 앞서 글을 발표하면서 작품의 근원이 되는 여러 기억들에 대해 자세히 묘사했다.
“맑은 가을 오후에 나는 플로랑스의 산타 클로스 광장 한가운데 벤치에 앉아 있었다. 물론 내가 이 장소를 보고 경험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정말로 심한 장염을 앓고 난 직후여서 아직 환자의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내게는 온 세상에 있는 대리석 건물과 조각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병에서 회복 중인 듯이 보였다. 광장 한 가운데에는 자신의 책을 손에 들고 긴 망토를 입은 단테의 조각상이 서 있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이 모든 것이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그림의 구도가 내 마음의 눈 속에 떠올랐다. 지금도 항상 나는 그 순간을 다시 보는 것 같다. 그 순간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순간은 내게는 아직도 어느 가을날 오후의 수수께끼이다.”
‘형이상학’이라는 표현이 대법원 판결문에 나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비물질적인 존재의 가능성, 무형의 실체와 사물 자체가 서로 연결되어 형성되는 새로운 존재가 존재하고 이를 은유적인 기호로 의인화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난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이상학을 비판한 것이 국가보안법 위반인지 여부를 언급한 이례적인 판결이 있다.
20여 년 전, 대학 교수로 근무하던 A는 학부들을 상대로 “연구 방법론”이라는 강의를 위해 만든 교재에 객관적인 세계의 인식 방법으로써 철학적 관념론과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주장하고, 사회현상을 계급론적으로 보아 사회변혁의 주체가 민중이고 민중의 투쟁에 의하여 역사가 발전한다는 취지의 내용을 포함시켰다.
국가보안법에서는 이적 행위를 금하고 있는데, 이적 행위란 대한민국의 헌법을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의 건설을 주장하거나 북한의 통일전선전술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정부를 전복시킬 것을 주장하거나, 자유민주주의의 기초 위에서 사회제도의 개선을 통하여 개혁을 주장할지라도 그 방식으로 폭력과 혁명을 주장하는 등 폭력 기타 비합법적 방법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존립과 헌법의 기본질서를 폐지, 전복하는 것을 선동하는 것을 의미한다(대법원 1996. 12. 23 선고 95도1035 판결).
또한 어떠한 표현물에 이적성이 있는가 여부의 판단은 결국 경험 법칙과 논리 법칙에 따라 자유심증에 의하여 판단할 것이고, 표현물의 전체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그 작성의 동기는 물론 표현 행위 자체의 태양과 외부와 관련 사항, 표현 행위 당시의 정황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결정하여야 할 것이며, 해당 표현물의 어느 표현 하나만을 따로 떼어 놓고 볼 것이 아니라 문맥을 통해 그 전체적 내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이적성 유무를 판단하여야 한다고 보고 있다(대법원 1993. 2. 9. 선고 92도1711 판결, 1996. 12. 23. 선고 95도1035 판결 등 참조).
그런데 예술을 포함한 학문에 관한 전반적인 연구는 기존의 사상 및 가치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을 가함으로써 이를 개선하거나 새로운 것을 창출하려는 노력이므로 그 연구의 자료가 사회에서 현재 받아들여지고 있는 기존의 사상 및 가치체계와 상반되거나 저촉된다고 하여도 용인되어야 하며, 학문연구의 방법으로서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을 수용하고, 이에 입각하여 단순한 현실의 묘사나 이에 따른 분석, 예측 또는 설명을 시도하는 것 자체는 그것이 이론적인 영역을 넘어 직접적으로 그 이념이 추구하는 사회적인 행동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한,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의 범주 내에 속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대법원 1993. 2. 9. 선고 92도1711 판결, 2005. 3. 11. 선고 2002도4278 판결 등 참조).
다만, 표현의 자유 및 예술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 권리이긴 하나 무제한인 것은 아니다.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그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제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대법원은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은 A의 교재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을 담은 국가보안법상의 이적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글 | 이재훈
문화칼럼니스트, 변호사, 고려대학교 겸임교수,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연구위원, (주)파운트투자자문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