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전
대웅전

 

[아츠앤컬쳐] 용문사가 자리한 용문산은 태조 이성계가 용이 드나드는 문이라 하여 용문산으로 부르게 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용문사가 미지산에 있으며 산을 용문이라 일컫는 것은 이 절 때문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용문사 창건에는 여러 설이 전해온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에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진덕여왕 3년(649)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고, 또 신라말 경순왕이 직접 이곳을 찾아 창건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정지국사 부도
정지국사 부도

조선 말 고종 30년(1893)에 봉성대사가 중창하였고, 순종 원년(1907)에 의병 근거지로 사용되자 왜군이 불태웠지만, 20세기 초에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 무학대사와 함께 지공, 나옹스님의 제자였던 정지국사 부도 및 비와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은행나무가 있다.

관음전
관음전

보물 금동관음보살상은 고려후기에 크게 유행한 양식으로 화려한 관에 네모난 얼굴, 늘어뜨린 머리, 아름다운 옷과 구슬 장식 등 14세기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금동관음보살좌상
금동관음보살좌상

아름다운 단풍이 절정인 10월말 11월초가 되면 용문사의 모습이 더 없이 찬란하고 아름다워 감탄이 절로 난다. 용문사가 유명한 이유는 뭐니뭐니 해도 은행나무다. 추정 연령만 1,100~1,500년인 이 나무는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고도 하고, 또 신라 의상대사가 그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도 한다. 본래 60미터의 거목이었으나 2001년 고사 위기에 처해 가지치기를 하여 현재 약 45미터인데, 아직도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라고 한다.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사천왕전이 불탄 뒤부터 이 은행나무를 천왕목으로 삼고 있으며, 조선 세종 때는 정삼품보다 더 높은 당상직첩을 하사받았다. 고종의 승하와 8.15 광복, 6.25 전쟁 발발 등 나라에 큰 이변이 생길 때마다 큰 소리를 내는 신령스러운 나무로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번은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는데, 맑은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 번개가 치고 톱을 댄 자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고 하며 정미의병(1907) 항쟁 때는 왜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은행나무만이 화를 면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한다.

지장전
지장전

1907년 8월 왜군 무장병력이 천년고찰 용문사에 들이닥쳤다. 용문사를 근거지로 한 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한 상황에 분노한 조선인들이 분연히 일어나 자발적으로 조직한 의병의 무력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일어났는데 이를 정미의병이라 한다.

산령각
산령각

양평에서도 의병들의 항일 투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는 무장군대를 동원해 의병의 핵심 근거지인 용문사를 습격해 불을 질렀고 고개 너머에 있는 상원사와 사나사까지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1907년 프레드릭 멕켄지의 의병 사진
1907년 프레드릭 멕켄지의 의병 사진

당시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를 주둔지로 삼아 활약한 양평 지역 의병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이 전한다. 한국을 방문한 영국 기자 프레드릭 맥켄지(Frederick A. Mackenzie, 1869~1931)는 외국언론에 대한 탄압과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잔혹함을 직접 취재하고 비판했으며, 의병들의 사진을 찍었다.

이는 당시의 유일한 의병활동 사진으로, 맥켄지는 “제복과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의병들이 희망이 전혀 없는 전쟁에서 죽음을 앞두고도 애국심이 무엇인지 영롱한 눈초리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여주었다”고 회고했다.

의병장은 맥켄지에게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는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구식 총을 든 의병들의 결연한 표정과 말은 아직도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범종루
범종루

 

부도전
부도전

 

글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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