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risprudence(1899-1907_Destroyed 1945)_Klimt
Jurisprudence(1899-1907_Destroyed 1945)_Klimt

[아츠앤컬쳐]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오스트리아 빈 교외의 바움가르텐에서 에른스트 클림트와 안네 핀스터 사이의 7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클림트는 19세기 말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주로 활동하였는데, 당시 빈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수도이자 예술과 사상의 중심지였으며 사상적인 면에서 보수적인 귀족주의와 급진적 변혁 사상이 공존하고 있었다. 클림트는 <우화>, <목가>와 같은 고전적인 작품을 그리며 화가로서 첫발을 내디뎠지만, 이후 당시 유행하던 아르누보와 상징주의 영향을 받았다. 아르누보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운동 이념을 바탕으로 한 양식으로, 해초나 식물의 넝쿨 따위를 연상시키는 길고 감각적인 선의 자연미와 소용돌이를 이루는 동선(動線)들의 역동적인 리듬감이 특징이다.

클림트는 세기말적 현상이 만연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꿈과 환상, 신비로운 에로티시즘(eroticism)과 죽음, 신화와 전설을 장식적인 곡선과 세련된 색채로 형상화하여 아르누보의 유기적인 조형성을 잘 보여주었다. 그는 누구보다 여성의 관능미를 표현하는 데 뛰어난 화가였으며, 경멸을 담은 것과 같은 무심한 표정을 한 팜므파탈의 이미지 그리고 화려한 색채와 장식적이고 기하학적인 장식 모티프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들은 화려하고 상징적이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보여줬다.

Philosophie(1899-1907_Destroyed 1945)_Klimt
Philosophie(1899-1907_Destroyed 1945)_Klimt

그만큼 그의 작품은 종래의 표현에서 벗어나는 파격을 보여줘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1894년 클림트는 빈 대학의 대강당을 장식할 천장화를 그려줄 것을 요청 받는다. 사실 그의 동료 마치(F. Matsch)와 함께 구상한 첫 도안은 매우 전통적인 것이었다. 대형 중앙 패널에는 ‘어둠을 물리친 빛의 승리’가 묘사되고(‘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는 무지에 대한 이성의 승리를 의미), 이를 둘러싼 4개의 사각형 패널에는 빈 대학의 4개의 학과인 신학, 철학, 법학, 의학을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질 예정이었다.

그중 클림트는 철학, 법학, 의학 세 학과의 그림을 맡게 되었는데, 이 요청은 클림트가 이전에 예술사 박물관과 부르크 극장에서 수행했던 공적인 작업과 목표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각 학문 분야의 대표성을 강조한 그림들이 새로 건축한 대강당을 더욱 돋보이도록 하는 가운데 설득력 있고, 인상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클림트와 마치가 처음 제출한 스케치에 대해 빈 대학과 오스트리아 교육부는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에 클림트가 내용을 일부 수정하여 심사에 통과했는데, 물론 이때 약간의 논란은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이후 그림에 대한 거센 논란이 일어난 것은 클림트가 실제 크기로 제작한 첫 번째 그림 <철학>이 1900년 전시회를 통해 대중에게 공개되면서부터였다. 요청한 천장화는 이성과 학문을 예찬하고, 합리적 과학의 사회적 유용성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아야 했다.

Medicine(1899-1907_Destroyed 1945)_Klimt
Medicine(1899-1907_Destroyed 1945)_Klimt

그러나 클림트는 세상에 대한 합리적 견해를 고집스럽게 부인했고 이를 그림으로 표현한다. 이 <철학>에는 애초에 요구되었던 ‘이성의 위대한 힘에 대한 찬양’이 뚜렷하지 않고 서로 다른 인생의 단계를 대변하면서 혼자 혹은 함께 등장하는 인물들의 자세나 움직임도 불확실하며, 그 시간적 차원도 알 수 없다. 그림의 구성 자체도 맹목적이고 애매해서 미완성 작품처럼 보인다.

몇 년 전까지 클림트가 그렸던 역사적 회화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 <철학>에서는 학문의 업적들을 시간과 공간에 따라 차례로 나열한 것이 없다. 따라서 클림트의 작품은 대학의 자랑스러운 업적과 경험을 재현하려 하지 않았다는 교수들의 평이 나온 것이다. 그런 데다가 <철학>에 나타난 벌거벗은 여인들 때문에 이 그림이 발표 되자마자 빈 대학 교수들은 맹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는데, 진리의 상징인 대학과 학문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87명의 빈 대학 교수들은 반대입장을 밝히면서 교육부에 작품 의뢰를 철회하라는 성명서를 제출한다. 또한 이 작품은 당시 빈 지식인들 사이뿐만 아니라 종교계에도 엄청난 파문을 일으켜 대중들에게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상황을 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작품을 의뢰한 측과 작가 간의 계약 내용이 우선하여야 할 것이다. 다만, 별도의 계약 내용을 확인하기는 어려우니, 통상의 법조문을 가지고 해석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림을 그려주는 작업에 관한 계약은 일반적인 용역이라고할 수 있는데, 위 천장화에 대한 비용을 빈 대학에서 클림트 측에 지
급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이와 유사한 판례는 아직까지 찾아 보기는 어려우나, 일반적으로 용역계약의 경우 하자와 미완성을 구분한다. 민법 제667조에서는 수급인에게 목적물을 하자 없이 완성할 의무를 부담시키고 있는데, 하자란 원칙적으로 완성된 목적물에 존재하는 불완전한 상태(구조상, 기능상, 미관상, 안전상)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일의 결과가 발생한 단계, 노무의 제공 자체가 끝난 상태를 전제로 한다. 이는 일을 완성하지 못한, 예정된 최후 공정을 종료하지 못한 미완성과는 차이가 있다.

민법 제665조에서는 보수의 지급시기에 대하여 ①완성된 목적물을 인도한 때 또는 ②목적물의 인도를 요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그 일을 완성한 때로 규정하고 있는데,일을 완성한 경우에는 하자가 있더라도 수급인에게 공사대금청구권이 발생하지만, 미완성인 경우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즉, 용역의 미완성과 하자를 구별하는 기준은 용역이 도중에 중단되어 예정된 최후의 공정을 종료하지 못한 경우에는 용역이 미완성된 것으로 볼 것이지만, 그것이 당초 예정된 최후의 공정까지 일단 종료하여 사회 통념상 용역이 완성되고, 다만 그것이 불완전하여 보수를 하여야 할 경우에는 용역이 완성되었으나 목적물에 하자가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함이 상당하고, 개별적 사건에 있어서 예정된 최후의 공정이 일단 종료하였는지 여부는 당해 용역 도급 계약의 구체적 내용과 신의성실의 원칙에 비추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 빈 대학은 클림트에게 비용은 제대로 지급한다. 이는 그림 주문 자체를 철회하라는 수많은 요청과 계속되는 논란과 반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클림트의 지지자였던 당시 교육부장관 하르텔 덕분이었고, 결국 그림들은 인수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그림들이 대학 강당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대신 오스트리아 국립현대미술관에 두기로 결정되었다. 논쟁이 끝나는가 싶었지만 이번에는 미술관 측에서 이 그림의 전시를 거부하고 나섰다. 오스트리아의 예술과 지성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클림트가 먼저 지쳐버렸다. 1904년 클림트는 교육부에 서한을 보내 자신의 의사를 밝혔고, 주변의 도움으로 미리 받았던 돈을 지불하고 자신의 작품들을 돌려받았다. 클림트는 이후 다시는 국가 기관의 주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글 | 이재훈
문화 칼럼니스트, 변호사,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연구위원, (주)파운트투자자문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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