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바로크란 정확히 무엇이며 서양 문화사에서 왜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어지는가? 바로크를 이해하려면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독일의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하여 유럽에 개신교와 천주교, 두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는 결국 두 개의 유럽, 즉 칼빈주의 개신교파인 부유한 북부 부르주아와 이에 비해 경제적으로 덜 부유한 남부 천주교파의 분리를 가져왔다. 로마는 즉시 루터에게 유명한 트렌트 공회로 맞섰으며 공회 이후 천주교 또한 개혁이 시작되었다.
바로크는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이때의 예술은 루터의 개혁에 반대하는 교육의 도구로서 그 목적은 신도들을 가르치고 감동을 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교육은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환상을 사실로 보이도록 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당시 로마에서는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와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의 새로운 건축 양식과 예술의 관점들이 건물과 교회, 그리고 분수에 적용되었다. 이에 교회와 궁전들의 외관이 수직적, 규칙적인 외양에서 곡선 형태로 변화하여 건축들을 역동적이고 극적으로 보이게 했다.
바로크와 함께 새로이 극장의 ‘무대’라는 단어가 대두되었으며, 미술이나 조각, 그리고 건축 등 모든 예술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예를 들어 회화는 중앙 초점에서 동적인 투시법으로, 초점은 두 개이거나 혹은 희미해지고 빛 또한 카라바조(Caravaggio)의 작품과 같이 어두운 배경의 인물들을 부각시키기 위한 극적인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조각품들은 정적이며 정면을 향하는 조각품들이 움직이듯 회전하는 형상으로 변모하며 역동적인 구성을 갖추기 시작했다.
바로크의 핵심어는 역동성, 표현성, 대규모, 신체적, 관능적, 열정적, 그리고 유희적으로, 이 모든 것들은 사실상 바로크 안에서 여러 예술 사이의 구분이 사라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바로크 이전 시대에는 모든 예술이 상위 예술과 하위 예술, 이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상위예술은 회화와 조각이고 하위 예술에는 목수, 가구 제작자, 부속 설비기사, 재단사 등 모든 종류의 장인들이 속해있었다. 바로크 시기로부터 이러한 장인들이 회화나 조각과 같은 주요 예술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하며 모든 종류의 예술이 동등한 가치를 갖게 되었고 음악 분야에서도 ‘오페라’가 탄생하였다.
오페라는 실제 작업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오푸스’에서 유래하며 곧 무대와 회화, 건축, 조각, 의상, 음악, 그리고 노래가 합쳐진 극장의 총체적 작업이다. 이러한 오페라는 토스카나 출신의 갈리 다 비비에나(Galli da Bibbiena) 가문과 관련이 있는데 비비에나는 150년이 넘도록 유럽 전역을 다니며 예술 분야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유럽 황실로부터 의뢰받는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을 비롯하여 회화, 조각 그리고 무대 디자인의 전반에서 일하며 오페라 극장의 구조를 창설했다.
바로크의 위대한 문화운동은 먼저 건축에서 출발하여 곧 회화로 연결되었다. 잔 로렌조 베르니니는 바로크 시대의 위대한 건축가이자 화가, 조각가 및 무대 디자이너로 많은 교황과 부유한 로마 가문들의 지지를 받았다.
조각가로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로마의 산타 마리아 테레사(chiesa di Santa Maria Teresa) 성당의 <성 테레사의 무아경(l’Estasi di Santa Teresa d’Avila)>이며 이는 아마도 바로크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조각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베르니니는 무대의 기획자로서 예배당의 공간을 문자 그대로 극장으로 변모시켰으며 그의 작품이 곧 하나의 극이 되었다. 그의 작품 속 무아지경 상태의 성 테레사를 찌르는 천사의 움직임은 특별히 설계된 공간의 중심에 자리한다. 이 공간은 숨겨진 창으로부터 햇빛이 반사되어 장면을 비추게끔 설계되었는데 마치 신성한 빛이 장면을 비추듯 보인다.
<무아경>의 극적 장면과 일관되게끔 베르니니는 성당 양측 면에 작품의 후원자들을 두 개의 박스석 안에 마주 보듯 배치한다. 이는 마치 이중극과 같이 성당 내부와 박스석 간의 착시효과와 더불어 이 조각상들로 하여금 삼차원적이며 사실적인 효과를 만들어 낸다.
사실상 환상적인 원근법의 사용은 베르니니가 공간에 대한 인식을 변형시키는 기술 중 하나이다. 베르니니가 창조한 가장 유명하고 웅장한 작품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광장의 열주들로, 그는 오늘날의 성 베드로성당 앞 광장을 재설계하고 건축하였다. 베르니니는 284개의 대리석 기둥을 4줄로 미묘하게 배열한 타원형 열주로 걸작을 만들어냈으며 이는 광학 및 원근법의 기술이자 나아가 연극적 기술이라 일컬어진다. 이로써 관람객들은 베드로광장에 들어서면 성당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성당에 거의 도착한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
바로크 양식의 또 다른 대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는 스위스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거주하였다. 성 베드로성당에서 화가 및 석공으로 일한 보로미니는 걸출한 기술로 곧 유명해지며 베르니니와 경쟁하게 된다(두 사람 사이의 경쟁은 이후 보로미니의 우울증에 이은 자살로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베르니니가 위대한 건축가이자 천재로 성공을 거머쥐었다면 보로미니는 장인이자 완벽주의자이며 자유인이었다.
보로미니가 디자인한 공간은 실로 역동적이며 환상적인데 그 예는 로마의 바르베리니궁전(Palazzo Barberini)의 나선형 계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시대적 본질을 바로 포착한 작품으로, 비선형이 아닌 나선형이며 내려다볼 때와 그 반대일 경우의 여러 시각적 차이를 수렴한 당대로서는 절대적이며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보로미니는 이 외에도 일련의 교회와 건물을 디자인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베르니니가 손대고 관찰하고 색을 입히며 극찬하는 귀한 대리석과 청동 등 값비싼 재료들을 배제하고, 벽돌담과 하얀 석고 그리고 회반죽으로 된 장식들을 선호했다. 게다가 그는 굴곡과 돌출의 기법과 함께 파상 벽의 가변성과 유연함에 뛰어났고, 보로미니언적 기법이라는 건축 체계의 대담함과 기교로 예술사에 이름을 남겼다.
베르니니와 보로미니, 바로크의 위대한 두 천재는 서로 다른 삶의 관점을 가지고 로마와 서양 문화의 귀중한 작품들을 창조하였다.
번역 | 길한나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글 | 로베르토 파시Basera Roberto Pasi
Journalist, Doctorate Degree University of Siena(Literature, Philosophy, History of Art with honors), Study at Freiheit Unverisität Berlin, Manager at Osho Resort, Poona India

